"점심 뭐 먹을까?"
"아무거나 괜찮아"
"김치찌개 먹을까?"
"어 괜찮아"
"칼국수 먹어?"
"어 그래"
"좋고 싫은 게 있을 것 아냐. 의견을 내던지 결정을 좀 해!"
정확하게 지난 토요일 와이프와의 대화이다.
왜 나는 결정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거나 모르는 걸까?
당연히 그건 아니다. 내 맘속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
"난 김치찌개도 칼국수도 싫고 순대국을 먹고 싶다구!"
그런데 왜 말하지 않을까?
얼핏 남을 배려하기 때문이라고 포장할 수 있지만 사실은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고 결정으로 인한 갈등상황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릴 때도 아주 내 의사를 뚜렷하게 주장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40이 넘어가면서 부터 적당히 손해보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해 진 것 같다.
그런 배경에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의 경험들을 체험하거나 목격하면서 겁이 나서 그런 것도 있고 실제 사소한 차이가 멀리서 내려보면 충분히 감당할 만한 것이라 굳이 집착하지 않게 된 것도 있다.
그리고 소위 나는 최소한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 하는 '꼰대포비아'로 인해서 내가 주장하는 것이 자칫 독선이나 고집은 아닐까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나친 경계가 일부 역할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비단 어떤 선택을 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삶의 자세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뭐...좋은 게 좋은 거잖아"
"대세에 지장 없잖아"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냐?"
"뭐 그런 거에 그렇게 애를 쓰냐"
많은 것에 '시니컬' 해졌다. 그리고 '시큰둥'해졌다.
열심히까지는 아니었지만 싸이월드나 페북 초반기에 꽤 글도 올리고 사진도 올렸다.
그러다 이런 게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소위 SNS를 끊었다.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내가 SNS를 안 하는 이유는 시간이 아까와서가 아니라 '시큰둥'해서 이다.
시니컬하고 시큰둥한 삶은 열정이 없고 감동이 없다. 만사가 뜨뜻미지근하다.
다른 사람의 사소한 노력과 그로 인한 작은 변화를 무시하기 일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조금이라도 실패 가능성이 있으면 도전하지 않는다.
남들은 더러 무던하다고도 하고 사람 좋다고도 하고 포용력이 있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그 원천을 거슬러 가면 결국 그런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 성공하고자 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에너지가 없기에 쉽게 안주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그 이름이 '야망'이든 '열정'이든 '도전'이든 혹은 또 다른 어떤 이름이든 그런 에너지가 사실은 삶을 빛나게 만드는 동력이고 엔진이다.
겨우 점심 메뉴 고르는 일 때문에 빠져든 반성이긴 한데 분명한 것은 현재 나는 그런 에너지가 없다는거다.
일단 당장 메뉴부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정해야겠다.
이제 "아무거나 괜찮지 않다!"
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