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커먼즈 <5-1> 노원도시농업네트워크와 천수텃밭
2019년 8월 하순. 오후 2시의 더위였다.
텃밭 한가운데라 산그늘도 미치지 않는데 철제 뼈대로 세운 인디언 집 안은 제법 서늘했다. 수세미, 조롱박 넝쿨로 드리워진 녹색커튼을 제치며 박기홍 하늘나무 대표가 들어서며 말했다.
“덥진 않으세요? 안쪽이 바깥보다 3도쯤 낮을 겁니다. 덩굴식물로 녹색커튼을 치면 온도도 낮춰주고 바깥 소음도 줄여주죠. 미세먼지도 흡수해줍니다.”
11년 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는 이제 도시농업 제품 개발자로 망치를 두드린다. 4~6월에는 녹색커튼을 설치하고, 7~8월에는 파이프팜 등 빗물을 이용한 시설을 만든다. 9~10월에는 축제 구조물이나 토끼장을, 11월 이후에는 태양광이나 태양열 기구를 제작한다.
직장 다닐 때처럼 매달 같은 금액이 들어오진 않지만 월 평균 400만~500만 원 소득이 들어온다. 80%는 시청, 구청, 농업기술센터 같은 관공서 물량이다. 최근 들어 개인의 주문도 늘고 있다.
“일이 계속 들어와요. 사람이 없어서 못써요. 목수 일당이 20만 원인데, 열흘만 일하면 한 달에 200만 원 벌어요. 왜 취업하느라 안 맞는 공부하고 그 고생을 했는지... 저희 부모님은 책상에 앉아 일하는 것만 직업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게 맞지 않았어요. 귀농교육 받다가 도시농업, 적정기술을 알게 됐죠. 중요한 건 교육이 아니라 ‘활동’이란 것도 알게 됐죠. 우리나라에 교육이 너무 많아요. 교육만 받고 활동을 안 해요. 활동을 해야 실력이 늘어요.”
‘활동’을 위해 그는 노원도시농업네트워크(이하 노도네)에 합류했다. 2만8000여 평의 천수텃밭이 실험장이 됐고, 130여명의 회원이 동료가 됐다. 여기서 파이프팜 등 도시농업 제품을 개발했다. 그러나 장소 사용비도 없고 회비도 없다. 단체가 일을 따면 적임자들한테 일을 나눠준다. 상사 갑질도, 발주업체 갑질도 없다.
그는 “내가 줄을 잘 잡았다”고 말했다. 이은수 노도네 대표가 공무원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할 말 다해주는 덕분에 여러 모로 좋단다.
교육하고 실험하고 일거리 나누고...천수텃밭 위 노도네
박 대표 등 노도네 회원들이 이런저런 할 수 있는 배경에는 두 사람이 있다. 회비 없는 비영리단체 노도네를 운영하는 ‘건물주’ 이은수 대표, 2만8000여 평 규모 천수텃밭을 연 400만 원에 빌려주는 ‘땅주인’ 마명선 노원도시농업협의회 회장이다.
두 사람은 각자 많이 가진 것을 내놨다. 이 대표는 시간을 내놨다. 본인의 생계는 원룸빌딩 임대료로 벌면서 노도네 대표로선 무급으로 봉사한다. 마 회장은 텃밭의 문을 열었다. 자기 땅을 노도네와 주민들에게 도시농업의 교육장이자 실험장을 제공한다.
공동으로 보유하고 운영하는 자산은 없다. 전통적 의미의 커먼즈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130명의 회원들과 함께 도시농업 분야에서 교육하고 혁신적 제품을 만들며 시행착오의 경험을 쌓고 공동의 지식을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육과정과 상품 아이디어는 자산화하지 않고 울타리 없이 전파한다. 다른 영리회사가 가로채지 않도록 상표권 등 최소한의 권리만 보호하되 회원 누구나 강의하고 사업하도록 사용권은 열어놨다. 지식과 관계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커머닝Commoning, 즉 공동의 것을 만드는 활동이다.
노도네는 2014년 설립된 도시농업 분야 비영리민간단체다. 서울시, 노원구와 함께 ‘노원 생태 도시농부학교’, ‘도시양봉과정’을 운영하면서 양성한 강사들과 일거리를 나눈다. 서울시 도시농업 민간단체 공모사업,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공모사업 등 프로젝트를 함께 따서 일은 회원들과 나눠서 하기도 한다.
천수텃밭은 도시농업 교육장이자 실험장이다. 하늘나무, 온순환협동조합, 서울대 지속가능 물관리연구센터(이하 연구센터) 등 회원들과 제휴기관들이 들어와 갖가지 도시농업 발명품을 실험한다.
넝쿨식물로 건물 온도를 낮추는 ‘녹색커튼’, 흙 사용량을 줄여 어디나 설치할 수 있는 ‘파이프팜’, 물 사용을 줄이고 퇴비를 쉽게 만드는 화장실 ‘토리’, 빗물을 정수해 담근 ‘하늘물맥주’ 같은 신제품도 개발한다. 노도네 교육과정 수강생들은 누구나 텃밭을 분양 받아 작물을 키울 수 있다.
주민들은 마을 우물가나 신당수 앞으로 모이듯 천수텃밭으로 모여든다. 노도네는 텃밭음악회, 팜파티를 열 땐 가수를 부르는 대신 연주를 전공한 동네 아이들한테 일거리를 주면서 자연스레 그 부모와 가족친지를 불러들여 천수텃밭을 체험하게 했다. 도시농부학교 등 수강생들한테는 ‘수업 들으러 오는 날엔 동네에서 밥 사먹으라’고 안내하면서 동네 식당들 매출도 올려준다.
노도네는 다른 동네 아파트에서도 텃밭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LH수서단지와 번동주공아파트에서 자원순환형 텃밭학교를 운영한다.
LH수서단지 텃밭에선 LH토지주택연구원이 개발한 음식물 쓰레기 발효기를 이용해 퇴비를 만든다. 이 아파트는 ‘음식물 쓰레기 제로 하우스’로 유명해졌다. 주민들은 텃밭에서 함께 농작물을 가꾸며 더 돈독한 관계를 쌓게 됐다.
이은수 대표는 “내가 하고 있는 도시농업은 기존의 것과 좀 다르다”고 말했다.
“그 전의 도시농업은 텃밭과 교육이 중심이었잖아요. 저는 숲, 아스팔트 등 모든 공간을 도시농업의 영역으로 삼아 무한확장하고 있어요. 옥상, 지하, 벽면 다 활용합니다. 빗물로는 맥주를 만들고 음식물 쓰레기로는 퇴비를 만듭니다. 그전엔 도시농업을 자연 사랑하는 사람들 여가 활동으로 여겼죠? 우리는 도시농업을 경제행위로 연결해서 상품으로 만듭니다. 과거에 도시농업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서 삶의 질을 높입니다.”
“도시농업으로 사회 문제 해결하며 삶의 질 높이자”
이 대표가 말하는 ‘사회 문제’란 고령화, 온난화다. 먼저 온난화 문제를 살펴보자.
국제연합(UN) 산하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0년간 온실가스 증가로 지구 평균기온은 이미 1도 가량 올라갔다. 과학자들이 '생태위기'를 부를 것이라 경고한 온도 상승폭 1.5도가 턱 바로 아래 다가왔다.
‘생태위기’는 곧 생계위기가 된다. 파리 기후변화협약 수준인 1~2.9도 이상 기온이 상승하면, 지구가 스스로 온실가스를 배출해 기온을 올리는 ‘찜통지구(Hophouse Earth)’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빙하가 줄어들면서 우주로 반사시키는 태양빛이 줄어들고,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흙 속에 묶였던 온실가스가 방출된다.
기후학자들은 찜통지구에선 평균 기온이 4~5도가 오르고 해수면이 10~60미터가 높아진다고 분석한다. 농작지와 도시를 옮길 겨를 없이 빠른 변화가 오는 것이다. 기아와 기후난민이 선진국 안에서도 발생하게 된다.
고령화 문제를 보자. 한국은 2017년 65세 인구 비율이 총인구의 14%를 넘어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2025년엔 노인인구가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가 될 전망이다. 고령사회 한국의 성장속도가 과거와 같을 수는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한국은행이 전망한 한국의 잠재 성장률은 2019년부터 이미 2%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경제 성장이 느려지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과거처럼 속도에 가치를 두고 살 수는 없다. 이 대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풀 해법으로 도시농업을 꼽는다.
“인구구조가 고령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빠름보다는 느림을 추구하게 됩니다. 삶의 속도가 느린 농촌으로 귀농, 귀촌을 원하지만 경험도, 준비도 안 된 인구는 늘고 있고요. 활력이 떨어져 슬럼화 된 동네에서는 도시재생이 필요해졌고요. 도시는 과거보다 더 더워지고 있어요. 그러면 이러한 문제들의 대안이 뭐냐. 도시농업입니다. 도시농업은 뜰 수밖에 없어요.”
그 역시 은퇴 후 ‘느린 삶’을 선택하면서 도시농업에 입문했다. 화장품회사 재무관리팀을 거쳐 정보통신시설 설치업체를 창업했던 그는 사업체 정리 후 원룸건물을 사서 임대업을 시작했다. 요샛말로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된 것이다.
그 건물 옥상에 올라가 서니 ‘이 공간을 푸르게 만들어 사람들이 모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도시농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옥상에 작물을 심자 걱정이 늘었다. 옥상에 무거운 흙을 올렸다가 건물에 금이 가면 어쩌나. 연못을 만들었다가 누수가 생기면 어쩌나. 이때부터 그는 여러 대안을 고민하며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러면서 환경 문제, 지구 온난화에 눈을 뜨게 됐다.
‘빗물박사’로 유명한 한무영 서울대 빗물연구센터장도 그 과정에서 만났다. 연구센터와 한 교수는 노도네 덕분에 서울대 옥상의 파이프팜 설치 등 다양한 실험을 실행할 수 있게 됐다. 노도네와 이 대표는 한 교수팀한테서 이론적 기반을 얻었다.
“퀴즈 하나 낼게요. 물이 있는 후라이팬과 물이 없는 프라이팬 중 뭐가 더 빨리 가열될까요? 당연히 물 없는 프라이팬이겠죠. 1960년대 땅엔 물이 촉촉하게 스며 있었어요. 비가 오면 하천으로 10%만 흘러나갔어요. 지금은 52%가 흘러나가요. 땅이 아스팔트로 덮혀 빗물이 바로 하수도로 빠지기 때문이에요. 땅이 바짝 말라 있으니, 햇볕에 빨리 덥혀져요. 물 순환을 회복해야 합니다. 물 한 방울이라도 땅에 받아서 쓰는 활동이 지구를 시원하게 합니다.”
서울 땅 절반이 ‘물 없는 프라이팬’이다. 서울의 불투수율은 2015년 기준으로 48.9%까지 높아졌다. 도시 개발로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땅을 덮은 탓이다. 1962년 7.8%에서 약 6.3배 늘었다. 2015년 서울 평균 온도는 1960년대에 비해 2.2도 올랐다.
그렇다고 아스팔트를 걷어낼 순 없는 일. 대안은 뭘까. 아스팔트와 시멘트 위를 다시 촉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이 대표는 한 교수의 표현을 빌어 “빗물을 심는다”고 말했다.
빗물은 여러 곳에 심을 수 있다. 먼저 옥상. 상자텃밭이나 파이프팜에 작물을 키우면 흙의 무게나 누수 걱정 없이 옥상텃밭을 가꿀 수 있다. 다음은 벽면과 창문. 넝쿨 식물을 드리워 녹색커튼을 치면 건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벽면이 비를 오래 머금게 할 수 있다. 담장에 파이프팜을 걸치면 도시재생 지역의 좁은 골목도 푸르게 가꿀 수 있다. 땅이나 건물 아래에 빗물 저장탱크를 설치하면 텃밭 가꿀 때 끌어다 쓸 수 있다.
이미 나무와 풀이 심긴 녹지에도 빗물을 더 심을 수 있다. 낙엽을 긁어내 땅에 물이 스며들게 하기. 죽은 나무를 눕혀 땅에 물이 고이게 만들기. 이렇게 하면 동물이 지나가다 먹기도 하고 지하로 스며 들여 지하수가 되기도 한다. 산불로 민둥산이 된 곳에 이렇게 조처하면 태풍이나 폭우 때 토양이 흘러내리는 속도를 줄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가 오면 땅에 스미지 못하게 해서 버립니다. 식수로는 지하수를 빼내서 먹습니다. 집어넣는 것 없이 빼기만 하니 지구가 빨리 더 뜨거워지는 거예요. 물을 많이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산성비니, 먼지비니 해서 빗물 더럽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래서 말을 바꿔야 해요. 우리(노도네 회원들)는 빗물을 하늘물이라 부릅니다. 하늘물은 귀한 느낌을 주잖아요. 귀한 것을 버리면 안 되지요.”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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