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커먼즈 <4-2> 지식커먼즈를 만드는 국내외 연구자들
(이어서)
물결은 이어졌다. 2019년 8월엔 39개 단체, 60여 명의 연구자가 모여 ‘지식 공유’를 위한 연대(이하 지식공유연대)를 선언했다. 선언서는 이렇게 배경을 밝혔다.
“오늘날 논문은 국내외 독점 업체들에 의해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그 가격과 계약관계가 지나쳐서 시민들은 물론 그것을 생산한 연구자들도 소외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중략) 외국의 독점 논문 유통 업체가 한국 대학들로부터 천문학적 금액을 벌어가는 이 같은 상황을 바꾸기 위한 집합적 노력과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
선언 참가자들은 “학술 연구 활동을 공공적인 것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경쟁과 성과주의에 물든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며 여섯 가지 부문의 변화를 일으킬 것을 선언했다.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첫째, 인문·사회과학 학회와 학술정보 업체들의 계약관계 재구조화.
둘째, 전자 논문 오픈액세스 등 공유화.
셋째, 이를 위한 정부와 공공기관의 지원 끌어내기.
넷째, 논문 평가제 개혁.
다섯째, 연구자 의식 개선.
여섯째, 학술활동을 빌미로 한 대학원생과 비정규직 교수 차별 철폐.
이 선언에 참여한 국공립대학협의회 11개 도서관을 대표해 축사를 발표한 이수상 부산대 도서관장(부산대 문헌정보학 교수)는 설명했다.
“우리 연구자들은 주로 공적 연구비로 연구해 학회에 투고하고 배포는 학회가 한다. 학회는 유통업체 수입을 기대하고 업체에 논문을 제공하지만 수입은 크지 않은 반면, 업체는 도서관들로부터 과다한 구독비를 받아낸다. 여기서 문제가 일어난다. 도서관이 지불을 못하면 연구자들은 자기 논문도 찾아볼 수 없다. 도서관과 연구자는 피해자가 된다.”
이들이 오픈액세스에 나선 건 가격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상용DB업체가 일부 학회에 공공 부문에 올리지 말고 자기네 DB에만 올리라고 계약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KCI, KISTI(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같은 공공 부문 DB에 논문을 올리지 못하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 학술지 창간호부터 공공 부문 DB에 올리고 있던 학회들은 논문을 확산시키기 어려워진다. 접근 채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 공공 부문 DB를 통해 학회 논문을 찾아봤던 연구자들이나 일반인이 공적으로 접근할 길이 사라진다. 한 마디로 지식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이다.
‘지식의 공공성’은 어찌 보면 연구자들의 사명이자 연구 기반이다. 지식공유연대 선언 자리에서 사회를 맡은 박숙자 대중서사학회 회장(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은 “우리는 지식의 공공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연구자들은 자신의 스펙과 성과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려 논문을 쓰는데 그 본래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의 박서현 학술연구교수는 “학술 지식이야말로 대표적인 커먼즈”라고 말했다. “커먼즈는 공통의 부로 정의된다”면서 그는 “학술 지식은 기존 지식 바탕으로 학문공동체가 협력해 탄생하며 설사 개인이 만든 것이라도 기존 지식, 공통의 부의 영향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지식 공유를 위해선 지식 생산자들이 연합해 지식이 공유되고 관리되는 방식뿐 아니라 지식이 생산되는 방식도 논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혼자선 못 한다” 연구자 등 인식 변화와 공공 부문 지원 필요
지식 생산자들의 연합회 중 하나가 학회다. 한국기록관리학회지를 통해 2019년 논문 오픈액세스를 진행했던 정경희 교수는 말했다. “할 수 있다. 어렵다. 혼자선 못한다. 많은 분들, 학회가 함께 해야 한다.” 정 교수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한국기록관리학회지는 지금까지 간신히 수지 타산을 맞추며 출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편집 비용이 최소한으로 책정되어 있는데, 앞으로 몇 년 지나면 현실화될 것입니다. 이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출판 플랫폼을 공공 영역에서 지원해준다고 했는데 고도화된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들 것일까. 앞으로 숙제입니다.”
정 교수에게 ‘숙제가 뭔지’ 좀 더 물었다. 크게 두 가지다. 오픈액세스에 대한 연구자들과 학회의 인식 변화. 그리고 공공 부문의 지원.
그가 처음으로 오픈액세스에 관심을 가진 건 2001년 농촌진흥청 도서관에서 박사 후 연수과정생으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저작권법을 개정해 인터넷 자원을 공유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농업 분야 논문부터 오픈액세스 전환을 전파하려고 했다. 농촌진흥청 도서관엔 예산이 있으니 그것으로 스캔본과 검색 인프라 만들려 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농업 관련 학회를 불러 모았으나 이사회에 안건으로 올릴 권한이 있는 책임자급은 거의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공공 부문의 역할을 중요하게 본다. 특히 논문 출판도 하고 학술지 비용 일부를 주기도 하는 한국연구재단이 중요하다.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고 학회에 학술지 출판비를 지원하고 학술지를 평가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재단 오픈액세스가 확산될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하여 그에 맞게 연구비, 출판비 지원, 평가를 시행할 수 있다. 그는 “본질적으로 학술 논문은 공유상태일 때 연구자가 논문을 쓴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는 유통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책을 쓰면 많이 팔아 인세를 벌 수 있어요. 그러나 연구자는 한 해 2~3개 정도 논문을 씁니다. 그걸로 돈을 벌려는 연구자는 없어요. 연구자한테 중요한 일은 내 논문을 더 많이 보게 해서 내 연구 결과를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서 인정 받는 것 즉 사람들이 인용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논문을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줘야 합니다.”
세금 투입된 연구성과물의 오픈액세스를 법으로 강제한 선진국들
공공자금 즉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연구성과물에 대해선 오픈액세스를 강제해야 한다.
미국에선 납세자연맹이 공공기금 받은 논문을 공개하라는 운동을 펼친 후, 법으로 미국 국립보건원(NIH) 자금을 받은 논문은 출판 후 12개월 내에 공개하게 했다. 이외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아르헨티나, 페루도 오픈액세스를 법으로 정했다.
영국, 호주, 일본, 중국, 네덜란드는 정책으로 강제한다. 독일과 프랑스에선 국가 예산이 50% 이상 들어간 논문에 대해 오픈액세스를 의무화했다.
한국 정부는 국가R&D에 2019년 20조5000억 원, 2020년 24조10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하지만 이 예산으로 나온 연구성과물은 연구기관 단독 혹은 국가와 공동소유가 된다(국가연구개발사업의 관리 등에 대한 규정 제20조 제2항) 국가 소유 자산은 국민이 공개를 요청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뿐 아니라 공공 부문의 연구기관들도 공공자금이 들어간 논문에 대한 오픈액세스 강제를 공론화한다.
2019년 9월 20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이하, KISTI)이 주최한 ‘국가 R&D 논문의 오픈액세스 법제도 개선 토론회’의 발표자들은 “국민 세금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나온 공공성과물인데도 이들 논문을 보기 위해서는 구독료를 내야 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과학기술기본법이나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관리 등에 관한 규정 등 조문을 개정해 오픈액세스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정 교수는 “한국은 이미 오픈액세스에 친화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오픈액세스 비용 마련을 위해 해외에선 논문처리비용(Article Processing Charge)을 저자, 저자소속기관, 저자의 연구비지원기관 등 저자측에서 확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는데, 한국엔 이미 저자가 APC를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록관리학회의 경우, APC는 한 편당 14만 원이었다. 2019년부터는 동료심사비를 중단하고 대신 그 비용을 출판비로 전환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용은 학술지 출판에 참여하는 조교 등 인건비를 지불하기도 어려운 최소한의 비용에 불과하다.
“대개의 학회는 상용DB업체들로부터 라이센스 피(저작권료)를 받아 논문 출판비의 일부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한국기록관리학회지는 논문 심사자에게 그동안 지불하던 심사비를 중단하고 그 비용을 출판비로 전환해 사용합니다. 심사자들이 기꺼이 동의해준 결과죠. 논문투고관리는 연구재단의 잼스를 무료로 사용해 해결합니다. 검색 유입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으로 일으키면 됩니다.”
연구비 지원과 학술지평가기관인 한국연구재단과 논문유통기관인 KISTI와 KERIS가 오픈액세스 확산에 대한 의지를 밝힌 상황에서, 남은 숙제는 더 많은 연구자와 학회가 오픈액세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학회가 스스로 지식 커먼즈 즉 지식 자원의 공유를 위한 자원 생산과 관리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기록관리학회는 지식 자원의 관리 체제, 지식 커먼즈의 전범을 보여준다. 이 학회는 논문이라는 지식 자산을 학회지 중심으로 한 데 모으고 있다. 자산 풀링이다.
이해관계자 즉 회원이 5명의 1명꼴로 이사회에 참여해 공동의 원칙을 정하고 자원을 관리하고 있다. 지배구조가 민주적이다.
APC 등 수입이 생기면 원래는 기여하는 만큼 심사료로 가져갔으나 현재는 오픈액세스를 위한 비용으로 전환하는 데에 회원이 합의해서 쓰고 있다. 수익, 혜택을 다 함께 나눈다.
만약 한국의 모든 학회가 기록관리학회처럼 오픈액세스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공공자금이 들어간 모든 연구성과물을 무료 공개한다면?
한국 언론사들의 기사를 볼 때 그러하듯, 모든 한국어 논문을 쉽게 검색해 무료로 볼 수 있다면?
위키백과가 정보 공유의 국제 연대를 만들어냈듯, 논문 오픈액세스가 지식 공유의 국제 연대를 만들어낸다면?
청소년, 장애인, 빈민 등 취약계층이 자기 집단의 문제를 분석한 자료들에 무료로 접근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추측 대신 근거를, 비난 대신 분석을, 불만 대신 대안을 이야기하는 세상이 온다면?
연구자와 교수들의 학술 공동체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지식커먼즈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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