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남동생 딸이 여름방학을 맞아 우리 집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다. 말 수가 없고 낯가림을 많이 해서 좀처럼 부모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혼자 지내보겠다고 왔었다. 그때 조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인데,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려 한밤에도 좀처럼 그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우리 집에 온 첫날 나와한 침대에서 잠잘 준비를 하던 조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고모, 이불 없어요?”
“이불? 덥지 않아?”
“저는 더워도 이불로 배를 덮어야 자요. 안 그러면 다음날 배가 아파요”
순간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를 따뜻하게 하고 자야 배탈 나지 않는다고, 항상 이불 덮으라고 하시던 아빠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칸방에서 살던 어린 시절, 우리 4남매가 발로 걷어찬 이불을 일일이 다시 덮어주시며 하시던 말씀이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수없이 들어온 말이었는데, 이젠 성인이 되어 더 이상 그 말을 듣는 일은 없다. 그렇게 기억 저편에 자리하고 있던 말을 어린 조카의 입을 통해 다시 듣게 되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막내 동생이 아빠의 영향으로 자기 딸에게 가르쳤을 것 같아서 확인해봤다.
“이불 덮어야 한다고 누가 가르쳐줬어? 아빠가 그래?”라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한다, 자기가 그렇게 느낀 거라고 답을 한다. ‘어머나! 이런 것도 유전인가?!’ 싶었다. 어이없는 미소가 지어지며 여름 이불을 꺼내 덮어주었다. “넌 할아버지 손녀가 맞구나!”라는 말을 조카에게 하자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나를 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묻는다.
“고모, 아빠가 막내예요?”
“그렇지. 큰 고모, 큰 아버지, 작은 고모 다음이 너네 아빠야”
“아빠는 사십오 세인데 고모는 몇 살이에요?”
“고모는 오십삼, 많지?”
“네”
뭔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할머니는 손주가 있으면 할머니예요, 육십 세가 되면 할머니예요?”라고 묻는다.
‘응? 육십 세가 되면 할머니냐고? 곧 육십 세가 될 고모가 할머니인지가 궁금한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할머니는 손주가 있어야 할머니인데, 고모는 결혼 안 해서 애가 없으니까 영원히 할머니가 안돼~~”라고 농담을 하며 하하하하 혼자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육십 세가 아니어도 손주가 있으면 할머니 되는 거야”라고 했더니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그럼 고모는 어떻게 해야 할머니 돼요?”
결혼하지 않은 고모가 영원히 할머니가 되지 못할까 봐 걱정인 걸까? 아니면, 마땅히 할머니가 되어야 할 나이에 할머니가 안될 거라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물어보는 것일까?
할머니는 손주가 있든 없든, 나이를 먹고 주름이 생기고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되어 가는 것으로, 몇 살이 할머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진지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할까?
“음... 너가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그 애가 고모를 할머니라고 부를 테니 그때 할머니가 되겠네”라고 알아듣기 쉽게 대답해주었지만, 스스로에게는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서른 살을 넘기고 서서히 내 얼굴과 몸의 형태가 나이 든 사람으로 보일 즈음에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때 대체로 학생, 아가씨, 아줌마 중에 하나를 부르게 되는데 어느 날부터는 학생이나 아가씨라는 호칭보다 아줌마 소리를 듣게 되어,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난, 결혼도 안 했는데 애도 낳지 않았는데 아줌마 소리를 듣는 것이 무척 억울했었다. 어딜 봐서 내가 아줌마냐고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할 때면, 꽤 이성적이었던 친구들은 "우리가 아줌마 소리 들을 나이야"라고 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었다. 그 아줌마 소리는 세월이 흐르며 '사모님'으로 바뀌었다. 이 말도 물론 익숙하지 않다. 특히 보험 회사 같은 곳에서 가입 권유를 할 때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자녀분을 위한~ 어쩌고 이런 설명을 하면 "전 결혼 안 했는데요!"라며 쌀쌀맞게 끊어버린 경우도 있다. 최소한 영업을 하려면 결혼 여부, 자녀 유무 여부는 알고 영업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며 씩씩댄 적도 있다. 아줌마든 사모님이든 이제 내 나이가 그렇게 불리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기에 의연하게 넘어가고는 있지만, 삼십 대 때처럼 억울하고 속상할 정도는 아니어도, 여전히 내 마음속으로는 동의되지 않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호칭이다. 그런데 할머니라니!
얼마 전 친구들과 만났는데 한 친구가 어떤 모르는 꼬마 아이가 자기더러 할머니라고 불렀다며 아주 우울했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가 이제 곧 할머니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된 거냐며 슬퍼했다. 그나마 그 친구는 아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어 조만간 진짜 할머니가 될 그런 날이, 몇 년 안에 일어날 친구였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나는 더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이었다. 아직도 아줌마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데, 마음은 이십 대인데, 할머니라니... 이 단어는 언제쯤 의연하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카 말처럼 육십 세가 되면 가능할까? 요즘의 오십 대는 예전의 오십 대와 같지 않고 예전의 삼십 대, 사십대라면서, 그래서 환갑을 지내는 사람들이 점점 없지 않냐고 한다. 사람의 수명이 길어져서 정신의 성숙도와 노화의 진행속도가 늦춰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나는 아마도 칠십이 되어도 할머니라는 단어를 좀 억울해하며, 슬퍼하며, 익숙해하지 않으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예감도 든다. 자연에 순응하며 성숙한 정신세계를 가진, 곱게 늙어가는 어른이고 싶은데, 할머니의 모습은 그런 어른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기에 그 나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나이 듦에 따라 바뀌는 호칭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