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두 손으로 나를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나이였던 것 같다. 아기가 젖을 먹으려고 안겨 있던 그 자세로 안겼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말이다.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시각이었는데 자지러지게 울어 대던 나를 달래주셨고 난 그 품에 안겨 두려움에 계속 울던 기억. 내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라 그저 달래기만 하던 엄마의 손길과 아빠의 목소리.
자주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안겨 있을 수 있을 정도의 몸집이라면 분명 아주 어렸을 때인 듯한데, 이상하게도 왜 그렇게 울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크면서 잊어버렸던 기억인데, 몇 년 전 불안감이 엄습해와 응급실까지 갔던 그 시기에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었다. 장난처럼 입 안을 동그랗게 부풀렸는데, 그게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져서 결국엔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에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려워지던 기억. 작은 소리와 미세한 냄새에 퍼뜩 놀라며 당장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마음이 졸여지던 그때,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이 소환되었다.
다른 집 현관문 소리가 가끔 “‘쾅”하고 평소보다 좀 크게 들리면 순간적으로 마음이 쪼그라든다. 지금은 그 쫄아든 마음을 곧 되찾는 편이지만, 그때는 그게 쉽지 않았다. 한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하고, '그 소리는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는 소리'라고 되뇌며 안정을 찾으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서 결국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이 된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커지는 소리를 들으며 어렸을 적 그 기억이 떠올랐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일 때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삽시간에 떠올랐고, 그 어린아이 때 느꼈던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 후로 그런 겁 많은 기질(?), 예민함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했다. 그래서 유독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일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운 일일 거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죽음에 초연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한 친구는 아예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라고 말해놓고 요즘 사람들이 많이 먹는 몸에 좋은 영양제는 이거다, 저거다 하면서 열심히 먹어야 한다고 하길래 "오래 살고 싶지 않다면서? 오래 사는 기준이 몇 살이야?"라고 물으니 "글쎄... 한 팔십?"이라고 한다. "그래, 150살까지 살 수 있다는 세상에 80살까지 라고 하면 큰 욕심부리는 건 아니구나" 했다. 나는 몇 살까지 살고 싶은가? 아마도 구십? 요즘 세상에 욕심이 과한 편 같지는 않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다. 내가 없는 세상이라니. 이성적으로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이 잘 돌아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존재가 사라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렇게 막연하게 두렵던 것이 조금 덜 해졌다는 것이다. 사람이 결국엔 가야 하고 자연의 현상인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내 존재가 사라져도 내가 있었다는 흔적이 남지 않더라도 지금, 내 존재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