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지는 것을 볼 때마다 이제 ‘내 인생도 저런 시기가 되어가고 있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내 인생은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지나, 찬란한 햇빛 속을 땀을 흘리며 달려도 힘든 줄 모르던 시기를 보내고 이제 가을이다. 가을도 초가을쯤이겠다고 생각했던 나날이 지나가고 어느새 완연한 가을쯤에 와있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늦가을에 이미 도달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래도 아직은 낙엽이 다 떨어진,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의 계절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애써 부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이 많은 건 당연하지만, 아직 여름인데 떨어지는 낙엽도 있다. 아직 푸른 잎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보며 ‘왜 이렇게 빨리 떨어졌니?’ 하며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거센 비와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든 나무줄기로부터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아서 떨어졌든,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진 것 같아서 길을 가다 한참을 그 떨어진 낙엽을 본 적이 있다.
반면에 한겨울에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나뭇잎을 볼 때면 그 강한 끈질김에 놀라기도 한다. 이미 푸른 기운을 잃은 그 잎사귀는 누가 보아도 살아있지 않음을 알 수 있게 “떨어진 낙엽” 색을 띠고 있고 그 건조함이 눈에 바로 들어온다. 저 나뭇잎은 강한 비바람을 이겨냈겠지, 그런데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영양분도 없이 어떻게 저렇게 착 매달려 있을 수 있을까 의아해진다.
인간 세상도 그렇다. 한여름에 지는 안타까운 사람이 있고 겨울 끝자락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든 결국 끝은 같을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 우리의 끝은 결국 같다는 것. 전임 대표님은 과거 일화를 자주 얘기하고는 하셨는데, 오랫동안 존경했던 회사 선배로부터 들었던 좋은 말들을 전해주시던 끝에 “결국 그분도 돌아가셨어, 지금은. 안 죽을 수는 없으니까”라며 별일 아닌 듯 툭 내뱉으셨다.
안 죽을 수는 없으니까
너무도 당연한 말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아마도 죽는다는 걸 잊고 지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 입사한 신입 중 한 명이 사람의 특징을 잘 잡아서 흉내를 내는데 거기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고 후배가 전해주었다. 어떻게 흉내 내는지 물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여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가 평소에 그런 말을 자주 했었던가?’ 싶으며 내 안의 두려움을 이렇게 밖으로 내뱉고 다녔구나, 참 주책이다 싶었다.
난 죽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어떤 상황에서 신입에게 이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신입 한 명에게만 말한 것 같지도 않다. 아마도 농담 반 진담 반처럼 얘기했었을 것이고 듣는 직원들은 그리 심각하게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죽는 게 두렵다고 말한 나를 귀엽다고 하겠지.
나이를 먹으면 걱정이 많아지고 불안해지고 겁이 많아지고 두려운 것도 많아져서 무엇을 시작하지 못하고, 하던 일을 못하게 되고, 즐기던 것도 안 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 이삼십 대 때는 두려움 따위 없었다. 혼자 해외를 다니고 낯선 곳을 가고 놀이공원에서 종일 롤러코스터와 바이킹을 타고 즐겼다. 이제는 비행기를 타면 사고가 날까 걱정되고, 호텔에 불이 나지는 않을까, 혼자 낯선 곳을 다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저 무섭게 돌아가는 롤러코스터는 어떻게 탔던 것인가 한다. 조카가 그네만 높이 뛰어도 날아갈 것 같아 두려워서 그만하라고 외치는 내 모습은 완전 겁쟁이,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늙어가는 사람이다.
다행인 것은, 요즘은 그런 두려움과 불안, 걱정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불현듯 어느 때에 몰아치듯 생겼는데 4-5 년 전에 그랬다. 그 현상이 꽤 자주 일어나서 제대로 숨쉬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런 몰아치는 기간이 3년 정도 갔다. 그래도 그 시기를 잘 넘겼더니 지금은 일상생활에서의 걱정과 불안은 덜하다. 그러나 여전히 롤러코스터, 바이킹은 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도무지 어떻게 신나 하며 탔을까 의아할 뿐이다. 아마도 나이 듦에 따른 두려움의 고착화가 되어버린 탓이지 않을까 한다.
죽음도 나이 듦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주 떠오른다. 내가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 입 밖으로 말하게 되고 ‘나’라는 존재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싫은 것도 말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친구들과 나누어야 할 대화를 직원들과도 했나 보다. 심지어 얼마나 자주 한 건지 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 되어 있다니 좀 부끄럽다. 그러나 창피하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오래 살기 싫다고 하고, 죽는 게 무섭지 않다고 한다. 난 죽는 것이 두렵고 오래 살고 싶다. 그것도 건강하게.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를 하면서까지 오래 살고 싶지는 않지만,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육체도 나 혼자 건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고 싶다. 그래서 운동을 하고 있고 취미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안 죽을 수는 없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한다. 무엇이든 결심을 하고 나면 편해지고 그 시기가 닥치면 또 덤덤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