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어요
21세기로 넘어가는 2000년 1월 1일에 Y2K라는 현상이 일어나 세상이 마비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컴퓨터가 2000년을 1900년과 혼동하여 오류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그러면 컴퓨터에 의존한 모든 시스템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얘기였다.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음울한 미래를 들을 때면 속으로 나이를 계산해 보고는 했다. 그러고는 매번 ‘2000년이면 30대 초반이니 죽어도 별로 아쉬울 것 없겠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나이도 아주 새파랗게 어린 나이인데, 그때는, 20대 때는 서른 살이 넘으면 인생 다 산 줄 알았다. 그리고 진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30대를 보내고 불혹의 나이라는 40대도 지나 하늘의 뜻을 안다는 50대가 되었어도 어른은커녕 더 유치한 자신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이로 인해 어른 노릇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물론 사람들도 어른이기를 요구한다. 책에서 보듯이 후배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어른, 어려운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하는 어른, 힘든 일은 앞에 나서서 해결하는 어른 등등 ‘어른’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을 어서 하라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재촉한다.
특히 회사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 초년병처럼 회사에 대한 불만을 불만으로만 얘기할 수 없다. 불만을 얘기하는 직원들의 의견을 들어 개선하고 어떻게 하면 불만족을 만족으로 돌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자리다. 내가 하는 말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리이기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실수는 끊이지 않고 하게 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괜히 나이를 먹은 건 아니야'와 같은 말처럼 경험이 쌓여 깨닫게 된 것들이 있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부딪히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는 더 나은 조언을 할 수도 있고 문제를 더 괜찮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다. 확실히 그런 부분에서는 어린 친구들이 볼 때 ‘어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나도 월급쟁이에 불과한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내가 나서지 않아도 회사는 굴러가’, 등과 같은 생각으로 주춤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더구나 위로 올라갈 욕심도 없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앞에 서야 한다며 후배들이 밀어댈 때는 난감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자리’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알고 싶지 않은 일을 알게 되고, 알게 되었으니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이렇게 ‘어른 노릇’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친구에게 넋두리처럼 늘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 친구가 따끔하게 말했다. “지금 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네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건 무책임한 거 아냐?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있으면 가려줘야 해.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를 확실히 알려주어야 직원들이 배울 건 배우고 반성할 건 반성하게 된다”며 “우리는 이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어른이야”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잘 활용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고도했다. 그러면서 “아이 낳고 키우다 보니 부모 역할이 있더라. 내가 잘하지 않으면 애들이 헷갈려하더라”라고 하면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우리의 위치는 이제 ‘어른’이 아니겠냐고 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난 어른이다. 징징대고 울기만 해서는 안 되는 어른.
어느 날엔가 후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가만히 있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구를 비난하는 말로 들릴까 봐 문제를 보고도 눈감고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문제의 심각성을 다른 사람이 모르고 심지어는 그 문제를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을 보고 '말해야겠다'라고 결심했단다. 이제는 뒤로 숨으면 안 되는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그 후배는 자신의 위치가 이제는 마냥 어리기만 하지 않다는 것, 나이 듦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어른의 역할에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영역이 있다면 그 또한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어렸을 때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몸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하실 부모님을 염려하여 더 말하지 않게 된다. 크게 아플수록 더 말하지 않게 된다. 마음이 아플 때는 더욱 그렇다. 입 밖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뿐더러 가까운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혼자의 힘으로 영 극복하기 어려울 때는 심리 상담사를 찾아간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식 때 내 옆으로 앉기보다는 가능한 먼 자리부터 채워지는 자리를 보며 씁쓸함을 견뎌야 한다.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어려워해서'라고 해석해야 정신건강에 좋다. 어렸을 적 가졌던 회사의 팀장, 부장에 대한 그 '거리감'을 이제는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거리감에서 오는 씁쓸함을 잘 알고 있는 현재의 나도, 대표이사 옆에는 잘 앉으려 하지 않고 구석 자리부터 찾는다.
극단의 한 단원이 "언니가 어른으로서 딱 중심을 잡고 있어 줘서 고마워요"라고 하는데 순간, "어머, 내가 무슨 어른이야"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 말을 그저 겸손하게 손사래 치는 정도로 들었을 것이다. 하긴, 이 나이를 먹고도 어른이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누가 어른이겠는가. 어른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경제적 독립, 의사 결정 등 주도적이고 자립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부분에서는 어른이 맞다. 어느 정도 사람을 볼 줄 알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고 외로움을 견디는 부분에서도 어른이다. 그러나 지혜롭고 현명하고 세상일에 조금은 초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그런 근사하고 멋진 어른은 아니다. '내 안의 유치한 아이'를 만날 때마다 좌절하는 어른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