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배운 것 중 하나는 아부는 나쁘다는 것이다. 아부 쟁이는 권선징악 이야기에서 항상 벌을 받았다. 아부의 사전적 의미가 ‘남의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림’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알랑거리다’는 뜻은 ‘남의 환심을 사려고 다랍게(언행이 순수하지 못하다, 지저분하다) 자꾸 아첨을 부린다’고 되어 있다. 단순히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있으므로 불순한 것이다. 불순한 목적을 가진 말과 행동은 좋지 않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사람은 없다. 상사의 심기가 불편하면 좋지 않은 내용의 보고는 조금 뒤로 미룬다거나, 동료나 부하직원의 성향을 파악하여 요청이나 부탁을 하기도 한다. 회사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비위를 맞추는 일은 필요하다. 소비자를 직접 만나야 하는 모든 서비스 직종의 사람들 또한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여기서 단순히 비위를 맞추는 것과 아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기본적으로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행위는 나의 안일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100% 순수한 목적이 아니다. 그럼, 이것은 아부인가? 그래서 나쁜 것인가?
유독 상사의 신뢰를 받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시기심 어린 행동 중의 하나는 그 ‘신뢰받는 직원’을 ‘아부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절하 시키는 일이다. 그 직원의 능력을 인정하기보다 윗사람에게 소위 ‘알랑방귀를 잘 뀌어서’라고 폄하하며 스스로 ‘위로’ 한다. 한때 나도 그런 시기심 어린 말에 동조하고, 그 해당 직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사람들 말에 휘둘린 적이 많다. 같이 일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그녀)의 능력, 업무 스타일을 모르면서 남들이 하는 말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코 듣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이 선입견과 편견으로 굳어버린 적도 있다. 막상 당사자와 얘기해보고 일해보면 그런 말들이 ‘참 터무니없었구나’하고 알게 되는 때가 있고, 실제로는 그런 류의 사람으로 판명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회사 생활하면서 남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고 지냈다. 성격적으로 무뚝뚝한 면도 있었지만, ‘아부’로 잘못 오해될까 봐 경계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아부’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면서도 상대방 기분을 상하지 않게, 말을 예쁘게 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단 상대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적절하고 긍정적인 리액션을 한다. 상대, 특히 상사의 심기를 헤아릴 줄 안다.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 어딘가 아파서 힘겨워할 때, 누군가와 관계가 좋지 않아 힘들어할 때 등등을 잘 살핀다. 이렇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해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심으로 비위를 잘 맞추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게 되니 비위는 저절로 맞출 수 있게 되고, 그건 배려가 된다. 상대가 곤란해하고 힘들어하는 부분을 그때그때 적절하게 파악하여 덜 곤란하고 덜 힘들게 하는 것이 배려이니까. 그렇게 ‘아부’가 아니라 배려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배려는 위에서 아래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성격적 결함으로 남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못한 것은 상사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부하직원에게도 잘하지 못했다. 아부로 보일까 봐 경계했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해 관심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직장에서 ‘배려’, ‘적절한 리액션’은 ‘알랑방귀’와 종이 한 장 차이다. 나는 절대로 아부 따위 하지 않는다고 자처하지만, 남이 볼 때는 아부로 보일 수 있다. 특히 상대를 배려한 결과물로 신임을 얻게 되면, 더욱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나이쯤 되고 팀장으로 13년 차쯤 되니, 아부성 발언인지 아닌지를 조금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부성 발언뿐만 아니라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는 것인지, 속으로는 반대 의견인데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겉으로 동의만 하는 것인지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떤 것이든, 수긍하거나 인정하는 리액션을 먼저 받으면 우선 기분은 좋다. 그 후, 어떤 성격의 리액션이었는지에 따라 내 의견을 수정하거나 밀어붙이고, 때로 심도 있는 대화로 이어지게 한다. 이를 거꾸로 대입하여 나도 상사에게 적절한 리액션을 하면 회사에서 한결 편하게 지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연습이 필요하다.
연극은 등장인물의 리액션으로 이뤄진다. 같은 이야기여도 배우 간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극의 느낌이 달라진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배우 김희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밀당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밀고 당기기가 피곤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녀는 적당한 밀고 당기기는 관계를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밀당처럼, 적당한 리액션은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굽신거리며 자신의 가치관을 내던지면서까지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리액션은 그 자체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겹겹이 쌓는 좋은 장치가 될 수 있다. 나의 말과 행동에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반응만 보인다면 상호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대표이사가 주재하는 전 직원 대상 행사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방청객이 보일 만한 박수와 함성을 보내는 몇몇 직원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대표이사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딱딱하게 흘러갈 수 있는 행사를 웃음으로 바꾸는 리액션임을.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만드는 행동임을. 어린 날의 나라면, 그 행동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왜 저러나’ 하면서.
나이 들어 좋은 것 중의 하나는 틀에 갇힌 사고가 깨지고 좀 더 넓게 볼 수 있게 된 점이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내지르는 직원을 보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 안의 편협함을 발견하고 반성하게 되는 것처럼. 반성을 했으니 적절한 리액션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영혼까지는 아직 담지 못해도 액션이라도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