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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Jul 31. 2024

진정한 어른이 아니라고 하시면

인사팀 업무를 맡았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팀장님은 애 낳은 적 없어 몰라요"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뭔가에 ‘퉁’ 맞은 듯 잠시 멍했다. ‘으잉? 얘기가 왜 이렇게 튄 거지?’ 상처 난 속이 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 말을 내뱉은 H를 봤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의식하지 못한 채 임신, 육아의 고충을 말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또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다가 마상(마음의 상처) 입었다.     

 

H와 H의 소속 부서 팀장이 언쟁했다. 남의 팀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인사팀장으로서 의무감이 발동하여 두 사람을 중재하려고 나섰다. 그 팀장은 H가 지시한 대로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했고 H는 팀장의 업무지시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했다. H는 소속 팀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자신은 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초지종을 말했다. 업무적 고충을 한참 얘기하던 H는 이 기회가 고충을 털어놓을 때라고 여겼는지 임신한 직원을 위한 회사 복지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현실적으로 얼마나 사용하기 어려운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입덧이 심해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로 달려가 게워야 하는 육체적 힘듦을 토로하며, 둘째를 임신한 상태인데 첫째 육아도 쉽지 않아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말지 고민된다고 했다. H의 힘듦을 100%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임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주변에서 봐왔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H는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근거로 “애 낳은 경험이 없다”를 별 악의 없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키 작은 사람에게 너무 작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뱅이라고 놀리는 것과 같다. 상처 주는 말이고 차별하는 말이다. 무엇이든 가진 자는 갖지 못한 자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돈, 권력, 명예는 물론이고 외모, 학벌, 사랑, 가정 등등 하다못해 자동차, 명품 지갑, 최신형 휴대전화라도. 사소한 것이라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서로를 잘 모른다. 나도 그렇다. 내가 가진 건 자연스럽기에 갖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생각 못 할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내게 없는 것을 확인받을 때 기분이 좋지 않다. 미혼의 출산 경험 없는 여자에게 “애 낳아보지 않아 모른다”라는 말은 아픈 말이다. 특히 미혼을 선택한 상황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혼자인 내게는. 나도 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입덧의 고통, 출산의 아픔, 육아의 고단함, 양육의 책임감 알지 못한다. 직접 겪지 않아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간접경험으로 머리로 이해할 뿐이다.      


결혼하고 애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는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경험한 후야 배려, 양보, 희생, 헌신, 수용, 모성, 부성 등등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겪어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애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말에 일부 동의한다. 그렇지만 결혼, 출산, 양육의 경험이 없다고 어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모성, 부성을 경험해야만 어른인가? 요즘엔 결혼해도 애를 낳지 않는 딩크족이 많다. 환경 요인 때문인지 노력해도 애를 갖지 못하는 부부도 많다. 그 와중 심심치 않게 부모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뉴스가 들려온다. 어른은 무엇인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어른 아닌가. 가슴에 묻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어른 아닌가. 자식 낳고 키워봐야 어른이라고 한 그 말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편견과 선입견을 양산하는 말일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식은 결혼한 부부 사이에만 존재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므로. 진정한 어른은 결혼 여부, 출산 여부와 관계없이 얼마나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 사람인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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