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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Sep 13. 2024

환생, 빙의, 회귀 없는 인생

웹소설 이야기를 이끄는 3대 세계관은 환생, 빙의, 회귀라는 말이 있다. 환생, 빙의, 회귀 모두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맞지만 조금 다르다. 환생은 나로 다시 태어난다. 마치 세계가 반복되듯, 평행세계가 존재하듯 주변 인물과 조금씩 다른 관계로 잘못된 일이 바로 잡힐 때까지 환생한다. 나는 주로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장르를 읽는데, 로맨스 장르답게 사랑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긋났던 운명이 몇 번의 생을 가로질러 만난다. 대표적인 작품이 ‘이 결혼은 어차피 망하게 되어 있다’라는 김차차 작가의 작품이다. 에필로그와 외전까지 합쳐 무려 600화가 넘는 대작이다. 여주인공의 심리를 꿰뚫고, 무조건적 사랑을 주는 남주인공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빙의는 다른 세계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설정은 주로 한국에서 잘살던 현실 인물이 자신이 읽던 소설 속 서브 혹은 단역 인물로 빙의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 속 서브, 단역은 독자 눈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빙의한 인물은 유독 그 서브 혹은 단역에 눈길을 주던 사람이다. 그 인물이 소설이 현실이 된 세계를 살며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얘기다. 역시 로맨스답게 끝에는 남주인공과 이어지거나 서브남주와 사랑을 이룬다. 한낱 이름 모를 민초였던 인물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인물이 되는 얘기는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세계의 주인공이란 메시지를 준다. 역사는 승자의 시점으로 쓰인 얘기라는 말이 있다. 누구의 시점으로 쓰였든 이 세상에 그저 스쳐 지나가도 좋은 사람이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어령 교수가 마지막 수업에서 백만 명이 죽었다고 그 죽음을 흔한 것, 일반화시킨 통계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개개인은 각자 자기 삶을 빛내는 주체다.


회귀는 같은 인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설정은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 2회 차 인생을 사는 것이다. 2회 차 인생에서는 미리 살아 본 인생이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 미래를 알기에 대비한다. 웹소설에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어게인 마이 라이프’가 대표적이다. 환생, 빙의, 회귀가 뒤섞인 소설도 있다. 언뜻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등장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해하게 된다. 물론 개중에는 터무니없는 얘기도 왕왕 있지만 잘 짜진 얘기가 넘쳐난다.      


세계관이 비슷한 소설을 계속 읽다 보면 다시 태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일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혹시 나도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연애 실컷 하고 아이를 낳아봐야지’라며 이번 생에서 하지 못한 일을 손꼽아본다. 작가로 대성한 상상을 해 본다. 부귀영화는 꿈꾸지 않는다.


죽는 순간 다른 세상에서, 혹은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뜨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것도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눈을 뜬다면? 짐승, 식물, 무생물이 아닌 사람으로, 나란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보장이 있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 수 있을까? 죽음이 두려운 나는 흔들릴지 모른다. 4~5년 전, 직원 중에 사람의 특징을 잘 잡아 성대모사를 하는 직원이 있는데, 그 흉내 내는 사람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고 팀원이 전해주었다. ‘나처럼 밋밋한 사람도 흉내 낼 구석이 있나?’ 의아했다. 도대체 어떻게 흉내 냈는지 물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해 깜짝 놀랐다. “난 죽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이 말을 내 말투로 똑같이 따라 했다면서 다들 그 말투에 배꼽 잡고 웃으며 나를 귀여운 팀장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에 웃기기도, 쑥스럽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을 들은 후 의식하지 못하고 내뱉었던 ‘죽는 게 무섭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얼마나 자주 했으면 나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을까 싶어 조심했다. 아주 주책맞은 건강염려증 환자다운 발언이라 부끄러웠다.     


어떤 사람은 오래 살기 싫다고, 죽는 게 무섭지 않다고 한다. 친구 우영은 “오래 살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서 몸에 좋은 영양제를 이것저것 챙겨 먹는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며 “오래 살고 싶지 않다면서? 넌 오래 사는 기준이 몇 살이야?”라고 물어봤다. “음~ 한 팔십?”이라고 한다. 100세 시대, 잘하면 15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세상에 80세는 짧은 게 맞는다며 수긍했다. 난 몇 살까지 살고 싶은가? 아흔 살이면 적당한 것 같다. 전임 대표는 소싯적 얘기를 많이 하던 분인데, 존경했던 회사 선배 얘기 끝에 “결국 그분도 돌아가셨어. 안 죽을 수는 없으니까”라며 별일 아닌 듯 툭 내뱉으셨다. “안 죽을 수는 없으니까” 너무도 당연한 말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아마도 죽는다는 걸 잊고 지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만 늘 염두에 두고 살지 않으므로. 인생은 한 번이고 이번 생이 행복했든 불행했든 우리 모두 이번 생에 남을 수 없다.      


나는 죽음이 다가올 때 그 시기를 미리 알고 싶다.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친한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에 널린 내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죽고 싶다. 때때로 임종을 앞두고 파티를 열어 가족, 친구들과 한바탕 재미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뉴스를 본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사고사는 싫다. 30대 때는 막연히, 무슨 신의 계시를 받듯이 죽을 날짜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는 몸이, 마음이 죽는 날을 알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날을 직감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그러다 나이를 더 먹자 미리 죽음을 알려면 현실적으로 질병에 걸려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병에 걸려야 대충이라도 언제 죽을지 알게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아파도 오래 아프지 않고 주변 사람 힘들게 하지 않고 조금만 아프다가 죽기를 바란다. 주변을 정리할 시간만 주어지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명치료는 안 할 것이다. 수술과 치료로 완치할 수 있는 병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만, 완치가 어렵고 고통을 둔화시키는, 수명만 연장하는 치료라면 하지 않을 마음이다. 뭐, 막상 그 일에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심정은 그렇다.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재미있게 살다 가고 싶다. 죽은 후에는 나무 밑에 묻히고 싶다. 화장을 터부시 했던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불에 태워지고 싶지 않다. 죽은 후 뭘 느낄 수 있겠나 싶지만, 가능하다면 땅에 묻혀 나무를 키우는 거름이 되고 싶다. 그런데 수목장도 화장한 후 묻힐 수 있단다. 아쉽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     


애초 ‘나’라는 존재가 없던 세상, 無였던 존재가 다시 無로 가는 것은 원상 복귀다. 내게는 존재의 사라짐으로 두려운 일이지만 타인에게는 자연의 섭리다. 그런 의미에서 겁먹을 이유는 없다. 직원이 흉내 낼 당시처럼 그렇게까지 무섭지 않다. 아직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준은 되지 않았지만, 현재를 살아야 함을 안다. 최소한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므로. 환생, 빙의, 회귀 없는 1회 차 인생만 살 수 있으므로 예상하지 못했던 기쁨과 성공은 그대로 만끽하고 화나고 힘든 일은 발산하거나 묻거나 풀거나 여러 방법을 동원해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이끌면 된다. 남편, 자식 없이 비혼으로 사는 이 삶은 이대로 현재를 즐기며 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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