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많이 부는 날이었다. 경량패딩을 꺼내 입었다. 계절의 흐름이 의식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 겨울지나 봄 문턱에서 오늘과 같은 13도~14도의 기온을 맞닥뜨렸다면 코트를 입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얇은 긴팔 위에 패딩을 입을 것이다. 아직은 추운 날이라고 여겨 겨울에 입던 습관대로 좀처럼 두꺼운 겉옷을 벗기 어려워했을 것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이라는 인식은 이런 13도~14도의 온도가 춥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두꺼운 옷을 꺼내 입기보다 재킷, 버버리, 카디건 등을 입거나 추위를 타는 사람이라면 경량패딩을 입는다.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으므로 코트는 입을 때가 아니라고 여긴다.
실제로 추위와 더위를 느끼는 뇌의 상태도 그런 것 같다. 한창 추위를 지나온 다음에는 기온이 올라도 계속 춥다고 느끼고 더운 날을 계속 지나온 다음에는 좀 기온이 내려가도 덜 춥다고 느낀다. 계절이 뒤바뀌는 곳으로 여행을 가면 더 실감하게 된다. 여름나라에 있다가 겨울나라로 가면 처음 하루, 이틀은 그렇게 추운 줄 모른다. 그래서 얇은 옷을 입고 며칠 보낸다. 그 나라 기온에 적응하면 그때서야 춥다고 느낀다. 반대로 겨울에 여름나라로 가도 그렇다. 제법 두꺼운 옷을 입고도 덥다고 잘 느끼지 못한다. 며칠 지나야 더위가 느껴지고 그때서야 반팔을 입는다. 기온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듯 뭐든지 상황이 갑자기 바뀌면 적응하기 전까지 몸과 마음이 일시적 마비 아닌 마비 상태가 되는 것 같다. 큰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 정지상태가 되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는 것도 그런 것 일 것이다. 반사 신경만 남아서 그렇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을 때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겉으로는 알아들었다는 반응을 상대방에게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간밤에 꿈을 꿨다. 직장동료 세 명이 등장했다. 한 명이 내 귀지를 파주겠다며 다짜고짜 내 귀를 보더니 귀지가 너무 많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뭔가를 내 귀에 부었다. 그렇게 몇 분간 놔두다 또 다른 한 명이 귀지를 파겠다고 귀를 들여다보더니 뭔가를 꺼냈다. 귀에서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두 개가 나왔다. 어떻게 그런 게 귀에 들어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목걸이는 내가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잃어버렸다고 여긴 목걸이었다. 우린 신기해하며 그 목걸이를 펼쳐보았다. 내가 귀를 한쪽으로 기울였더니 귀지 덩어리들이 자동으로 빠져나왔다. 시원했다.
그런데 오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에서 내 꿈과 비슷한 단편소설을 읽었다."신경 써서"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인데주인공이 자고 일어났는데 귀에 물이 찬 것처럼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별거 중인 아내가 베이비오일을 데워 귀에 붓고 십분 가량 있다가 오일을 빼내자 귀지가 빠져 잘 들리게 된 내용이었다. 귀에 오일을 붓는 일이 괜찮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민간요법인 모양이다. 희한하다. 귀에 뭔가를 부은 후 귀지가 빠져나오는 내용이 일치한다. 이 소설을 읽으려고 그런 꿈을 꾼 걸까?
,구름이 작고 흐리게 떴다(11:57, 14:23)
화실에서 집으로 가는 길, 태양빛이 역광으로 비친 모습이 가을 느낌 난다. 오른쪽 사진은 마스크를 쓴 외계인 혹은 요괴 혹은 괴물이 눈에서 연기를 뿜는 것 같다. 옅은 구름은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임의 흔적을 길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