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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놓기

2024. 12. 25

by 지홀

눈을 뜨자 방 안이 환하다. 겨울이라 아침 7시도 어두운데 환할 걸 보니 해가 꽤 높이 뜬 것 같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었다. 몸이 느끼기에 수면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늦잠을 잤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진다. 아침밥을 해야 하는데 부모님 모두 일찍 일어나시는 분들이 아니어서 느긋하게 준비했다.


여러 단톡방에서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느라 진동이 쉴 새 없이 울린다. 나도 인사를 얹어본다. 한 은행에서 AI가 제안하는 카드를 원하는 대로 고르는 서비스를 하는 중이다. 카드 디자인, 문구를 취향에 맞게 골라 저장할 수 있다. 마치 나만의 카드를 만드는 것 같아 재밌다. 여러 버전의 카드를 만들어 받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올렸다.

5시도 되지 않았는데 해가 진다(16:49)

손목닥터 앱에서 오늘 걸으면 1,500원을 준다고 하여 산책 겸 집을 나섰다. 5시 무렵이긴 했지만 벌써 노을 진 서쪽 하늘은 굉장히 이국적이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더욱 비현실적이다. 주택가를 벗어나 큰길을 건너 대학로에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마다 가게마다 극장마다 가득하다. 중년의 남자분들이 술집 앞에서 메뉴를 보며 들어갈지 여부를 얘기한다. 10대, 20대로 보이는 아이들이 네 컷 사진관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크리스마스니까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 트리가 예쁘게 설치된 마로니에 공원으로 걸었다. 일련의 무리가 구호를 외치며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공원에 설치된 피아노를 어떤 소녀가 치고 있다. 수 없이 다닌 공원인데 그곳에 조선시대 고산 윤선도 시인 생가터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마도 눈에 늘 뜨였을 텐데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같은 시각, 방향에 따라 다른 색깔의 하늘 (16:50, 16:54, 16:54)


새삼 눈으로 봤으되 입력하지 않아 기억에 남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귀로 들었지만 집중하지 않아 흘려들은 말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신중한 고민 없이 내뱉은 말은 또 어찌나 많았을지 반성하게 된다.

지는 태양의 발광 (17:08)

극장 앞은 공연을 보려는 남녀커플이 많았다. 공연장에 가면 대개 여성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오늘만큼은 남자 관객이 꽤 될 것 같다. 대학로를 한 바퀴 돌아 성당에 갔다. 미사를 드리지 않은 지 10년 넘었지만 교무금은 매년 낸다. 물리적 공간에 매번 찾아가지는 않지만, 마음만은 천주교 신자임을 잊지 않았다는 증빙으로 낸다. 더불어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어 일석이조다.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 신청을 하고 아주 아주 오랜만에 성당에 들어가 짧은 기도를 드렸다. 성당 밖의 십자가의 길을 둘러보고 성모마리아 상 앞에 꾸며진 구유를 구경했다. 성당은 언제 가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든다. 그 성스런 분위기가 마음을 정화시키는 듯하다.

가로등과 저녁 하늘(17:32)

번잡한 대학로 거리를 걸으며 크리스마스로 한껏 들뜬 사람들의 기운을 느꼈다면, 성당에서는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전달되어 마음이 안정되었다. 슬슬 부모님 저녁을 차려 드리러 돌아갈 시간이었다. 동네에서 젤 맛있는 붕어빵 포장마차로 갔다.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싶어 걷는 내내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었다. 그 와중 붕어빵이 생각났는데 한약을 복용 중이라 망설였다. 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예전처럼 들뜨는 마음은 1도 없지만 크리스마스는 좀 너그러워지는 날이니까 나 자신에게 너그럽게 굴기로 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로 무장한 채 붕어빵 포장마차로 당당히 걸어갔다. 언제나 줄 끝이 보이지 않았기에 오래 기다릴 각오를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가게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것과 딴판으로 붕어빵 포장마차에는 긴 줄이 없었다. 내 앞에 3명만 있었다.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꼭 실내 천장화 같은 하늘(17:42)

이 붕어빵 포장마차의 붕어빵은 미니다. 다른 집 붕어빵보다 좀 작다. 작은 만큼 가격도 착하다. 4개에 천 원. 단팥 붕어빵을 좋아해서 거의 유혹에 넘어가는 편인데 1개는 늘 아쉽다. 그런데 미니 붕어빵은 2개를 먹을 수 있다. 죄책감이 덜하고 만족감은 커진다. 맛도 좋다.


옆 동네, 화실과 극단 연습실이 있는 곳에, 진짜 맛있는 붕어빵과 호떡집이 있다. 미니 붕어빵과 맛을 비교해도 우승이다. 그러나 1개 이상 먹기 어렵다. 먹고 싶으나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세하다. 미니 붕어빵은 고민하지 않고 먹는다. 희한한 일이다. 누가 뭐라는 사람 없는데 나 혼자 괜한 죄책감에 고민한다. 좀 큰 붕어빵 1개를 먹든 2개를 먹든 미니 붕어빵 3개를 먹든 4개를 먹든 모두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1개 이상 먹으면 안 된다는 죄책감, 당당하게 2개를 먹는 마음 모두 내가 만든 기준이다. 이상한 기준으로 스스로를 괴롭힌다.


마음을 내려놓고 불필요한 번뇌를 놓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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