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3
오랜만에 주의 집중되는 연극을 봤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가장 소중한 가족을 의심하고 상처 준 끝에 뿔뿔이 흩어지고야 마는 가족의 얘기다. 미국의 추리소설 작가 토머스 H. 쿡의 소설을 각색한 "붉은 낙엽"이다.
가족 간에도 하지 않아야 할 결정적인 말들이 있는데, 남주인공 에릭은 그 말을 내뱉고야 만다. 마음속에 간직하는 말이라도 눈빛과 태도로 그 말이 전해져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데, 기어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만든다. 말의 힘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진실이란 때로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지.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듣고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작금의 헌재 탄핵심판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연 후에 토크쇼가 있었다. 대개 이런 토크쇼는 연출과 배우들이 관객과 대화하는 자리를 만드는데, 프로파일러 권일용 교수가 등장했다. 아마도 연극 내용이 실종사건과 범인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인 듯했다. TV에서 많이 보았지만 그분의 말을 제대로 들은 적 없었는데, 오늘 토크쇼를 계기로 참 괜찮은 어른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유는 그분의 통찰력 있는 얘기에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에 대해 얘기한 부분은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우리는 유리공과 고무공 두 개를 쥐고 있다. 유리공은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것들이다. 가족, 사랑 같은 것. 고무공은 일, 돈, 명예 같은 것들이다. 유리공은 놓치면 깨진다. 고무공은 놓쳐도 다시 튀어 오른다. 그런데 우린 고무공을 더 소중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부모님이 떠올랐다. 더 다정하게 대해드려야겠구나 다짐했는데, 실천을 마음처럼 잘할지 미지수다.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가장 잘 다스려야 하는 마음은 분노, 화가 아니라 "배려심"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 숨이 멈췄다. 평소 다스려야 하는 감정이 "화"라고 여기며 화, 짜증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배려심이라니. 배려심을 다스린다니? 그분의 설명은 이랬다.
배려한 마음을 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려에 대한 대가를 기대한다. 기대한 만큼 고마워하지 않으면 서운해한다. 그런 마음이 쌓여 어긋나기 시작한다. 내가 주었으면 그거로 잊어야 한다.
가족에게 생색내고 인사를 받으려고 하는 순간, 관계는 비즈니스가 된다. 사랑으로 껴안고 가야 할 가족 사이가 대가를 서로 주고받는 건조한 사이가 된다.
그분은 질문하는 관객에게 조명 때문에 관객석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맞추기 어려우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만 돌리겠다고 이해해 달라는 말을 하셨다. 사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잘 몰랐을 텐데, 질문하는 관객이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고 불쾌해할까 봐 미리 설명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배우를 비롯한 공연 관계자와의 대화도 좋지만, 이런 색다른 인물과의 토크쇼가 참 신선했다. 아주 유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