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0
강남에서 강북으로 넘어오는 버스 안이었다. 5시가 넘은 시간이라 해지는 모습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창문에 바짝 붙였다. 한강변 아파트에 주황빛이 스며드는 중이었다. 저 멀리 하늘도 노랗고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열심히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한남대교를 건넜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기에 정류장에 내렸다.
'어? 낮이 길어졌네!' 문득 주위를 돌아봤다. 6시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 환했다. '아, 드디어 겨울이 가고 있구나. 이 두꺼운 패딩을 벗을 날이 곧 오겠구나. 봄이... 오겠구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올 겨울은 유난히 정신없다. 제일 큰 이유는 엄마가 다치셨기 때문이지만 신경 쓸 곳이 많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 편인데 나이 들며 우산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다가 어딘가에 잠시 내려놓고 그냥 오는 거다. 입고 있던 카디건을 어디에 뒀는지 몰라 끝내 못 찾은 적도 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까맣게 생각나지 않는다. 선글라스는 3개를 잃어버렸다. 지난주에는 선배와 저녁을 먹고 식당문을 나서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돌아갔다. 가방을 의자에 그냥 놓고 온 거다. 가끔 부차적인 물건을 잃어버리면 이젠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가방은 부수적인 게 아니라 메인이다. 항상 들고 다니는. 그런 가방을 그냥 놓고 나오다니, 순간 아찔했다. '잊어버릴게 따로 있지, 어떻게 빈손으로 덜렁덜렁 걸어 나올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어 은근 걱정하면서도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서라고 애써 자신을 안심시킨다.
이렇게 정신없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나도 더 여유를 찾고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멀티를 잘하는 사람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설이 있는데, 그럴 것 같다. 처음엔 멀티를 잘하는 사람이 순발력이 좋고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이니 치매와 거리가 멀어야 하는 거 아닌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인지 알 것 같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 나중에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거나 그중 하나는 아예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일을 잘 처리했을 수 있지만 과정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일 뿐만 아니라 사람하고 관계도 그렇다. 선물 받을 때 고맙다고 인사하고 선물 준 사람의 생일에 나도 잊지 않고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얼마 못 가 잊어버린다.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심지어 선물 받은 사실을 잊을 때도 있다. 내가 상대방을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선물 받을 때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다. 대면이 아니라 비대면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시대여서, 고맙다는 인사를 문자로 한다. 얼굴 보며 실물을 주고받고 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면 더 오래 기억할지 모른다.
그런데 사진으로 물건을 받고 문자로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으면 그 행위에 집중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다른 일을 동시에 하면서 문자를 한다. 다른 친구, 동료와 문자를 하거나 혹은 회사 일로 채팅 중이거나 길을 걷는 중이거나 등등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기보다 동시에 여러 일을 한다. 그게 더 효율적으로 느껴진다.
평소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정신을 분산시키며 일하는데, 올 겨울은 더 그럴 일이 많았다. 늘 들고 다니는 가방을 놓고 빈손으로 다닐 만큼.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한 가지에만 집중하며 딴 데 정신 팔지 말아야 한다.
얼른 꽃피는 봄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