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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힘

2025. 3. 20

by 지홀

며칠 전 승진한 후배가 한 턱 쏜다고 하여 훠궈집에 갔다. 후배가 무려 58도에 달하는 고량주를 가져갔는데 식당에서 마셔도 된다고 했다. 콜키지(corkage) 비용도 받지 않는 식당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를 제외하고) 중국식 샤부샤부에 아주 잘 어울리는 술이라며 즐겁게 마셨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앞에 두고 회사 얘기부터 나라 얘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다 인생 드라마 얘기를 하게 되었다. 심금을 울렸거나 기억에 오래 남는 드라마가 무엇이었는지 말하는데 대체로 비슷했다. 남자 후배들이 첫 번째로 꼽은 드라마는 "나의 아저씨"였다. 나는 대략적인 스토리와 서너 개의 에피소드를 봤지만, 정주행을 한 적 없어할 말이 없었다. 그다음에는 "비밀의 숲 1"이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짜인 얘기와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였던 드라마였다. 대사 중 비리는 '밥 한 끼"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밥 한 끼'로 모르는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바뀌고 아는 사람이니까 모른 척할 수 없어 작은 일에 편의를 봐주고 그 편의가 점점 커져 거대한 비리로 발전하게 되는 일은 회사생활하면서도 익히 밟을 수 있는 수순이다. 우리 같은 피라미 직장인들은 큰 비리로 갈만한 건더기 있는 일을 하지 않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뿐, 누구라도 그런 과정에서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런 관계에 빠지지 않으려면 '밥 한 끼'를 같이 한 후 계산을 내가 해야 한다. 상대방이 내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해야, 다음 기회를 만들지 않게 된다. 사회생활하며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언제나 공짜는 없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세 번째는 "눈이 부시게"였다. 그 드라마 제목을 처음 들어본다는 후배가 있어 스토리는 빼고 얼마나 감동적인 드라마인지를 알려줬다. 남자들도 재미있게 본 드라마라고 하여 의외였는데 '아들'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었다고 한다. '엄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드라마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한 김혜자 배우의 수상소감이 드라마 대사였다는 것까지 알고 있어 놀라웠다. 이 드라마를 못 본 후배는 다들 드라마 마니아냐며 신기해했다. 나는 한 때 드라마를 잘 보던 사람(지금은 웹소설, 웹툰으로 넘어옴)으로서 남자후배들이 생각보다 드라마를 많이 봐서 얘기하는 재미가 있어 좋았다. 그들은 몇 년 지난 드라마를 최근에 OTT를 통해 봤다면서 여성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런 것 같다고 슬픈 듯, 우울한 듯 웃으며 말했다. 1회를 보기 시작하면 끊을 수가 없어 계속 보게 된다고.

빠르게 흐르는 구름사이 만월 (08:35, 08:39, 08:39)


하루 24시간 중 스트레스받는 회사에서 8~9시간, 어떤 날은 10~11시간 지낸다. 잠자는 시간 6~8시간, 출, 퇴근 시간 1~2시간, 씻고 준비하는 시간 30분~2시간을 합치면 거의 15~19시간이다. 여기에 하루 밥 먹는 시간으로 약 2~3시간을 쓰고 나면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짧게는 2시간, 많아야 6시간이다. 잠을 좀 덜자면 시간이 늘어나지만 루틴 하게, 물리적으로 써야 하는 밥 먹고 씻고 차 타고 오가는 시간은 줄이기 어렵다. 거기에 아이든 부모든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면 오롯이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든다. 그러니 회사 다니며 운동하거나 취미활동하거나 공부하거나 뭔가를 하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그나마 우리에게는 2일의 휴일이 있어 그 휴일에 미뤄두었던 것들을 하게 되는데, 드라마에 몰입하여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고 때로 정화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팍팍한 삶에 아주 작은 위로가 될 듯싶다. 굉장히 저렴한 비용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야기의 종류는 각자 다르지만 마음을 홀리는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드라마 마니아에서 웹소설, 웹툰을 애독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나도 사람들이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싶다.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는 핑계로 오늘도 열심히 읽는다.


신촌의 오후 하늘 (08:40, 14:2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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