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3
아침 8시까지 자고 일어나 리조트에서 요플레와 호두모찌빵, 우유를 먹었다. 화장실이 1개라서 서울로 일찍 올라가야 하는 L언니가 먼저 사용했다. L언니는 우리보다 입사 선배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와 친해져 입사동기 모임에 자연스레 같이 다녔다. 오늘이 L언니의 엄마 생신이셔서 먼저 서울로 가기로 했다. 내가 씻는 사이 간다고 하여 욕실 문만 빼꼼히 열고 인사했다.
체크아웃 준비를 하는데 내 가방에 현금이 있다. L언니가 먼저 올라가 미안하다며 돈을 넣어놓고 간 거다. 이번 여행은 첫날만 빼면, 매 끼니와 음료를 누군가 산 모양이 되었다. 각자 이유가 다양했다. H가 이런 분위기 될까 봐 조심스럽게 밥 한 끼 산다고 한 건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며 난감해했다. 나야말로 어정쩡했다. H와 Y가 아침과 음료를 살 때만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얻어먹었는데, M과 E가 선물과 저녁을 산 데다 L언니까지 돈을 주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럼 내가 뭐가 돼?"라며 볼멘소리를 했더니 다들 "넌 총무 하느라 고생하잖아"라며 어디 갈지 정하고 정산하는 일이 복잡한 거라며 위로했다. 삼십 년 넘은 친구들이라 시기 질투하는 마음은 없다. 자랑할 일 있으면 축하해 주고 부러워할 일 있으면 부럽다고 말한다. 서로 잘난 척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들 한 턱씩 쐈는데 나만 안 하는 건 불편했다. 결국 점심으로 먹은 충무김밥을 계산했다. 이렇게 식사, 음료와 디저트 등을 각자 담당한 덕에 공동경비는 얼마 나오지 않았다.
거제와 통영 여행은 MT 같은 여행이었다. 한 방에 다 같이 모여 밤늦도록 얘기를 하고, 관광지보다 식당과 경관 좋은 카페에서 또 얘기를 나눴다. 통영이 고향인 사람에게 추천받은 카페는 음료와 빵의 맛을 월등히 뛰어넘었다. 거제에 있는 카페 '온더선셋'의 노을은 환상적이었고 또 다른 카페 '마소마레'는 야외 빈백 의자에 늘어져 멍하니 바다를 보기에 좋은 곳은 물론이거니와 제빵사 기능장이 구운 빵이 맛있었다. 오늘 들린 통영의 카페 '네르하 21'은 통창으로 펼쳐진 초록빛 바다의 광활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펜션까지 같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다음에는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어졌다.
우리가 입사동기로 만난 회사에서 같이 일한 건 2년 남짓, 그 후 하나, 둘 퇴사하고 이직하고 결혼하고 거주지를 옮기며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 와중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일과 모르는 일이 있는데 이번 여행은 서로 몰랐던 얘기들을 많이 듣고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M과 E가 유산했던 아픔, M이 우리가 알던 직원으로부터 청혼받았던 얘기를 듣고 모두 놀랐다. 특히 연애 얘기는 모두의 관심을 확 끌기에 충분했는데 옛날 고래적, 잊고 있던 기억을 소환하여 서로 놀리기도 했다.
오후가 되자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지만, 초록빛 바다와 푸른 하늘 나름의 운치가 있는 날씨였다. 마지막으로 들린 카페 경관이 너무 멋져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발코니로 나가 독사진을 하나씩 찍었다. 각자 멋진 포즈를 취했는데 머리카락이 심하게 날리는 바람에 의도치 않은 웃긴 사진을 건졌다. 한 사람씩 다 웃긴 사진이 나와 배꼽 빠지게 웃었다. 몸이 흔들리며 퍼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순수한 웃음을 언제 지어봤나 싶을 정도로 실컷 웃은 우리는, 우울해지는 날 이 사진을 보며 웃어야겠다고 농담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2박 3일 동안 끊임없이 얘기했는데도 못다 한 얘기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서울, 춘천, 창원으로. 각자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갔다. 서울 사는 친구들은 좀 더 자주 만나자며 헤어졌지만, 어쩌면 내년 장가계 여행 갈 때 만날지 모른다. 오늘이 엊그제인 줄 알고 연락하지 않고 지내다가 불현듯 1년 전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고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정말 힘들고 우울한 날 금방 찾아볼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