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18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간의 내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의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하긴 기원전 사람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인간이란 어떠한지를 통찰하고 있었으니.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利器)로 인류는 점점 편안해지고 있지만,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삶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불멸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셰익스피어의 희곡 "십이야"를 한국식으로 각색한 무대를 봤다. "십이야"라는 제목을 알고 있었지만 연극으로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줄거리는 큰 차이가 없을 듯한데, 한바탕 소동극을 본 것 같다. 배우들이 빠른 속도로 말하면서 몸동작 합이 딱딱 맞아 보기 편했다. 속도감이 있어 2시간이 넘는 공연임에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공연 중간, 중간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가장 눈에 띈 배우는 1인 2역을 한 이승우 배우다. 선장과 초란 두 역할을 했는데 몸 움직임이 날렵했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은 둔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그런 선입견을 아주 잘 깨뜨린 배우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배역은 술주정뱅이 쟈가둥과 그를 사랑하는 향단이다. (나는 왜 술주정뱅이를 좋아하는지 의아했으나,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난 너무 T다.) 이 세 명의 분량이 주인공보다 더 많았던 느낌이다. 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쌍둥이 남매와 그 남매들과 맺어지는 두 남녀 오사룡과 서린아씨는 분명 존재감 있고 연기도 좋았으나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배우들의 실물을 찾아봤는데, 등장인물과 완전 다른 사람들이다. 분장의 힘이란 이런 거구나 느끼게 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공연을 같이 관람했던 단원이 다음에는 "분장 아카데미"를 하자고 제안한다. 좋은 의견이라고 다들 맞장구쳤다. 우리 극단 단원 중에 국립극장 회원이 있다. 덕분에 할인가격으로 무려 맨 앞줄에서 연극을 보는 호사를 연속으로 누리는 중이다.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헤다 가블러에 이어 오늘도 맨 앞에서 봤다. 배우들의 침 튀기는 모습까지 보면서 표정과 몸짓, 눈빛을 볼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운이다. 공부가 많이 된다. 연극배우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취미로 하는 것이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므로 열심히 보게 된다.
연극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다. 셰익스피어처럼 천재로 태어나지 못했으니 공부해서라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래야 글 쓰는 일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더 많이 알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남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