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30
"생각 없이 약속을 잡았네. 오후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못 간다고 할까. 어쩌지?"
어제저녁, 엄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저녁 비행기라 오후에 나간다고 말씀드렸는데 약속을 잡으신 모양이다. 12시 30분에 약속했는데 오전으로 바꾸겠다고 하셔서, 그래도 엄마가 오실 시간에 저랑 마주치기 어려우므로 그냥 오후에 가시라고 했다. 아침 느지막이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엄마는 "너 가는 거 못 보잖아"라고 하셔서 못 보면 어떠냐고 했다.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아침잠 많으신 분이 일찍 일어나 가시지 말고 천천히 일어나 나하고 같이 밥 먹고 가시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데는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싶은 속마음이 있었다. 나 역시 무슨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한동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지 못할 거란 생각에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오전에 가시면 그 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그냥 원래 약속대로 하시라고 권유한 거다. 그래도 엄마는 가방 들고나가는 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셔서 엄마와 같이 집을 나서기로 했다. 어차피 더운 날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공항에 일찍 도착하여 카페에 있을까 했으나 문득 카드사가 제공하는 혜택이 있을 것 같아 찾아봤다. 그런데, 찾아보지 않으면 억울할 혜택이 떡하니 있다. 라운지 무료 이용권이다. 공항 라운지는 항공사 우수고객이나 이용하는 건 줄 알았는데, 카드 혜택 중 하나로 이용할 수 있는 라운지가 있는 건 몰랐다. 20대 때부터 공항을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항공사가 운영하는 라운지만 있는 줄 알았다. 시원한 곳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니 일찍 공항 가는 보람이 생겼다.
오늘 아침 11시에 집을 나섰다. 엄마가 오후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그 시간에 나가셔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 앞 대문에서 헤어졌다. 어디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가는 것도 아닌, 각자 갈 길이 다르므로 집 앞에서 헤어져야 하는데, 그 순간을 위해 일찍 나섰다. 아빠는 오후에 간다더니 왜 벌써 가냐며 의아해하셨으나 엄마에게 맞추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공항에서 시원하게 있다가 출발한다고만 말씀드렸다. 3주간 집을 비우기는 근 2년 만의 일이라 부모님도 나도 괜히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해진다.
카드사 혜택으로 이용한 라운지는 워커힐 호텔에서 운영하는 라운지인데 골드와 일반으로 나눠져 있다. 골드는 만원을 추가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하여 일반 라운지로 갔다. 최대 3시간 체류할 수 있다며 4시 15분에는 체크아웃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비행기 출발이 6시이므로 1시간은 탑승 게이트에서 기다리면 되어, 적당히 머물 수 있는 시간이다. 라운지는 사람들로 붐볐다. 앉을 좌석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2인석 자리를 발견했다. 간단한 뷔페 음식, 차와 커피, 라면, 여러 종류의 디저트 등 먹을 것이 풍부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브런치에 올릴 글을 먼저 작성하고 식사는 나중에 하기로 했다. 문득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테이블의 사람들이 자주 바뀐다. 나처럼 3시간씩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간단하게 음식을 먹고 잠깐 얘기를 나눈 후 짐을 챙겨 나갔다. 라운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워낙 많은 승객들이 왔다 갔다 해서인지 음식을 치우고 차리고 테이블을 쓸고 닦고 하느라 정신없어 보인다. 다들 좀 피곤해 보인다. 공항 라운지는 단골손님보다 전 세계에서 온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어서일까, 환대하는 느낌을 주는 건 없다. 식기류를 치우는 로봇이 왔다 갔다 하면 승객이 알아서 빈 그릇을 그 로봇의 트레이에 얹어놓는데, 조만간 여기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의 일자리는 저런 로봇으로 대체될 것만 같았다. 일류 호텔에서 운영하지만 호텔에서 받는 친절과 환영의 느낌 없이 그냥 일반 뷔페식당에서 먹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운지 이용 문턱이 낮아져 이용자가 많기 때문에 일에 치여 그럴 수 있다.
예전에 아시아나 항공, 대한항공을 많이 탈 때 마일리지가 제법 쌓여 라운지를 이용했다. 그때는 특혜라도 받은 양 어깨가 으쓱했다. 1명의 동반자까지 이용할 수 있어 같이 출장 가던 직원에게 은근한 잘난 척을 한 적도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갈 때도 라운지를 이용하며 "잘난 딸"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때 엄마는 모든 주류가 공짜라는 걸 아시고 맥주, 와인 등을 꽤 드셨다가 비행기에서 취기가 올라 고생하셨다. 지금은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해외여행 가시는 건 무리다. 이 회사로 옮기며 해외 출장을 몇 번 갔지만 단거리 출장이 대부분인 데다 자주 가는 편은 아니어서, 더 이상 항공사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라운지 이용과 멀어졌는데, 오늘 라운지 체험은 그때의 기억으로 좀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뭔가 대접받으리라는 기대.
대접을 받는 일은 사람의 기분을 즐겁게 만든다. 대가를 바라고 잘해주는 건 접대다. 비즈니스 파트너를 접대하듯이. 대접은 좀 더 사적이고 인간미가 느껴지고 따뜻하다. 대가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관광산업이 환대산업인데 나는 이런 '대접'받는 느낌을 관광객에게 서비스하는 것이 관광산업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대접받는 기분은 뭔가 색다른 서비스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손님이 다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행주를 든 직원이 뒤에 서서 얼른 일어나 나가기를 기다리지만 않아도 된다. 라운지 이용을 마치고 나올 때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하는 직원만 있어도 좋았을 텐데, 누가 들고 나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 분위기가 참 낯설었다. (들어갈 때는 직원이 이용권 확인 및 이용 안내를 하지만, 나갈 때는 어디에다 인사를 하고 나와야 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그냥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