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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Gap Year Story

새로운 삶을 위한 아이디어 01

맛있는 케이크를 구워볼까?

by woomit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대표 키워드였다.

사실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각디자인, 산업 디자인, 패키지 디자인, 제품 디자인...

2D와 3D를 자유롭게 넘나들기까지 한국과 독일에서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결국 내가 바라던 걸 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런데 모든 걸 혼자서 다 할 줄 알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상상했던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나니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디자인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니 처음엔 받아들이기가 조금 힘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다시 시작하니 성과도 나의 성장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진짜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무력감이 커져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러는 바람에 깨달았다.

세상에 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어떤 의미로든 개인적인 성장을 해야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동안 내가 디자이너로 행복했던 건 나의 성장을 자주 확인할 수 있어서였나 보다.

나는 이제 어떻게 여기에서 더 성장해야 하는 걸까?

뭘 더 배워야 하나?

차라리 사람들과의 협업하는 소프트 스킬을 더 익히는 게 좋을까?

그런데 그 방법이 과연 나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2D 디자인에서 3D 디자인으로 내 영역을 넓혔던 방법과 같이

나의 영역을 또 한 번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사실 Chat GPT를 비롯한

각종 생성형 A.I를 베타 버전으로 골고루 경험해 보았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A.I로 파생된 상품 제작도 해보고 인터넷 판매도 시도해 봤지만

결론은 이래서는 여태껏 내가 성장하던 방식으로는 성장할 수가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디자인에 대해서 큰 조예가 없이도 누구나 디자인하는 시대가

더 가속화되겠구나라는 예상 또한 확신으로 변했고 말이다.

하려고만 한다면 AI와의 협업을 통해 더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니까.

슬럼프니까 잠시 멈춰있을까?

그러다 관심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그때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에게 닥친 문제가 뭔가를 해서 해결되는 문제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근본적인 문제를 남겨두고 돌아가는 방법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기에 생각이 더 많아지기만 했다.




특히나 뭔가를 시작해도 또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에 한숨이 자꾸 늘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길이 살짝 보인 건 2023년 9월 즈음 동네 빵집 겸 카페 안에서이다.

워낙 먹는 걸 사랑하기에 맛있는 음식이나 커피와 빵을 파는 가게를

구글맵에 표시해 두고 찾아다니는 편인데 멀리 나가기 귀찮았던 날,

집 근처의 가까운 카페에 간 덕분에 제과 명장인 카페 주인장의 케이크를 맛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과 명장의 카페인지 모르고 케이크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고

그리고 엄청 어려 보였던 맑은 미소의 주인장과

카페 한편에 붙여져 있는 제과 명장 자격증에 두 번 놀랐다.

(독일 친구들은 대부분 청소년 때부터 성숙해 보이는 편이기에 이 친구는 정말 어릴 확률이 높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카페 안은 활기가 넘쳤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벽에 붙어 있던 제과 명장의 자격증이 일주일 내내 계속 생각이 났다.

나의 직감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나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고 먹는 거 좋아하는데


생뚱맞긴 한데 케이크를 구워보면 어떨까?




1. 할 수 있는 일인가?


지금 나의 베이킹실력은 취미라고 하기에도 너무 소소한 수준이다.

그냥 머핀이나 파이를 굽고 잼을 만드는 정도로 어쩌다 하는 연간 행사이긴 하다.

크림이 들어간 케이크는 거품 내는 믹서가 없어서 구워본 적은 없지만

쿠쿠밥솥으로 파운드케이크 정도는 만들 줄 안다.

독일은 제빵(Bäcker)과 제과(Konditor)가 분리되어 있다.

둘 다 체력을 요하는 직업이지만 빵은 제과보다 훨씬 더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나는 일단 체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확실히 제과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2.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이라면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서 취업하면 된다지만

여기서는 Konditor 아우스빌둥으로 시작해야 한다.

총기간은 3년으로 수능 점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업주와 이야기해서 2년 과정으로 줄일 수 있다.

Ausbildung과정이 끝나면 Meister(장인) 과정을 풀타임으로 6개월 듣고

시험을 봐서 제과 장인이 될 수 있다.


3.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일인가?


뭘 장식하고 꾸미는 일은 내가 지금껏 해 온 내 직업과도 맞닿아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장점인 디자인을 접목시킨다면 나는 계속 창조적인 일을 하며 성취감을 누릴 수 있을 거 같다.


4. 그 밖의 장점?


첫째, 누군가를 음식으로 대접하는 일은 내가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가장 편안한 방식이다.

나를 찾아주는 고객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독일에서는 제과 명장 자격증이 있으면 아우스빌둥을 제공할 수 있고

카페나 빵집을 여는 것도 가능할 수 있도록 여러 경제적이고 정책적인 지원을 해 준다.

셋째, 언제부터인지 아무나 가져갈 수 없는 나만의 기술을 가지고 싶었는데

이 일은 그런 일에 가깝다.




갑자기 Ausbildung 지원을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울 거 같지는 않은데 시도는 한 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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