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잃었다.
더위가 치닫는다. 땅 위의 존재들을 비웃듯 치밀하게 계산된 더위가 내려앉는다.
섭씨 34도, 습도 68%, 체감온도는 36도.
폭염주의보 알람이 매일 울린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처음 폭염주의보가 울렸을 때는 보내오는 메시지를 읽으며 그래도 우리나라의 안전재난 시스템이 잘되어있구나를 느끼고 3줄 분량의 텍스트를 읽어본다. 하지만, 지금은 폭염주의 알람이 울리면 그저 성가시다.
사춘기 시절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듯 알고 있는 것을 자꾸 말하는 느낌에 메시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접어버린다. 그랬다. 압도적 더위 앞에서는 감사의 감정은 사치였다.
신이 내린 형벌인지 자연이 내린 형벌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더워질 때면 사람들은 기후위기다 온난화다 하며 지난한 환경에 대한 이기적 우위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곤 한다.
더워진 여름에 대한 인간의 초라한 반성과는 별개로 도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실외기의 열기는 마치 스스로 높새바람이라도 된 듯 빌딩 산맥을 넘어 고온 건조한 바람을 퍼뜨린다. 그러면 사람들은 건조한 도심의 사막풍이 무서워서라도 감히 건물밖을 나올 용기를 내지 못한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도심의 사막을 건너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손에는 들고 있어야 지켜보는 이들이 안도를 하게 되고, 비록 한 블록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도 차라는 무생물이 없이는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건물 밖이 두려워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강렬한 에어컨의 그늘 아래에서만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 하지만, 그 숨에 대한 대가는 노동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은 더운 날씨에 일을 하도록 설계되어있지 않다. 노동이란 개념이 확립되었다고 하는 농경의 시작에서도 이른 아침에 필요한 일을 마무리하고 한낮의 태양이 너무 따갑다면 잠시 농기구를 내려놓고 그늘에서 땀을 식힐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여름을 빼앗겼고, 자본은 여름을 밀어냈다.
사무실은 조용하다. 에어컨은 낮게 웅웅 거리며 차가운 바람으로 채찍질한다. 적막 속에서 키보드 소리만이 리듬처럼 이어지고, 모니터가 발산하는 강렬한 빛에 현혹되어 여름날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내밀고 쳐다본다.
한 때 여름은 잠시 멈춤의 계절이었다. 산복도로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했던 낡은 주택의 마당에서 매미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수박을 먹으며 하늘을 보던 날, 어머니가 선풍기의 머리를 조절하시며 “너무 더울 땐 그냥 쉬는 거야”라고 하셨던 말씀이 귀 언저리에서 맴돈다.
에어컨 아래서 우리는 더 이상 더위에 땀을 흘리진 않지만, 내면은 서서히 말라갔다. 업무 지시가 담긴 메일 알림음, 채팅창에 찍힌 빨간 숫자, 다음 주까지 끝내야 할 보고서. 그 모든 것들은 더위를 잊게 만든다. 사실, 더위도 여름도 심지어 겨울도 중요하지 않은, 그저 실내 온도 22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창밖으로 여름이 넘실대고 있다. 거대한 더위가 짙은 회색 빛 건물외벽에 부딪히며 들끓는다. 모두가 더위의 공포를 말하고, 이 더위에 밖에 나갔을 때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한다. 하지만, 그곳에 바람이 있고, 매미소리가 있으며, 나무의 그늘이 있고, 흐르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창 안의 사람이다. 잘 조절된 공기 속에서, 자유를 잃은 대가로 자리를 얻은 사람.
나는 오늘도 똑같은 자리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고, 숫자를 맞추고, 회의에 들어간다. 에어컨은 계속 돈다. 시계도, 보고서도, 회사의 논리도 멈추지 않는다. 이 시원한 바람 아래에서, 여름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그냥 사라진다. 그렇게 더위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