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몽

by 우물

분명히 그 이전의 꿈에서 이어진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꿈의 조각은 그즈음부터다.
회색빛 벽으로 둘러친 아주 작은 골방의 복권판매점.
얼굴 없는 판매점 사장님과 내게 주어진 마카팬.
로또 용지에 번호를 마킹해야 하는데, 번호를 마킹하지 않고 있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로또 용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대신 몇 개의 번호를 적는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이 꿈에 나온 번호를 기억해야만 한다라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쩌면 내게 주어질지 모르는 행운이라고 생각되니 혹시 꿈에서 깨면 번호를 잊어버릴까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번호를 되뇌며 버둥대며 일어나 책상 위의 종이에 기억나는 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3, 8,...

하지만, 종이에 숫자를 적는 것조차 꿈이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은 젖은 수건 마냥 무거웠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의 정신이 그 꿈을 놓아주지 않았다.

또다시, 꿈에서 받은 번호를 종이에 적는다.
그렇게 안심하는 나를 꿈이라고 의식이 다그친다.
잠이 깨는 듯 하지만 여전히 수면상태이다. 자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위에 눌린 것은 아니었다.
몸은 조금씩 뒤척이지만 정신이 온전히 깨지 못했다.
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한다.
나의 무의식은 꿈에서 본 그 번호에 대해서 계속 집착하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침대에 누워서 번호를 되뇌고 있다.
종이에 적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계속해서 되뇌고 있는 것이다.
이미 로또의 번호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 번호가 비루한 나의 인생을 조금은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코딱지 같이 말라비틀어진 희망에 나는 매달리고 있었다. 마치 그 번호를 놓치면 산산조각 나서 주워 담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일어나지 못했고, 책상 위의 종이에 번호를 적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번호를 되뇌었다.

르네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1929


꿈에서의 내가 측은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길몽을 꾼 것인지 벼락 맞을 확률이라고는 해도 매주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현실에서 특별히 복권을 구매하지도 않으면서 내 무의식은 그리도 그렇게 삶을 바꾸고 싶었나 보다.

알람이 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알람 소리는 마치 최면을 깨우는 손뼉소리처럼 무거워 늘어진 정신을 깨웠다.
습관처럼 알람을 찾아 끄고 잠시 침대에 앉아 있었다.
현실에서는 꿈에서 깬 후에도 번호를 종이에 쓰거나 하지 않는다.

3, 8…

의미 없는 숫자는 그저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면서 진하게 아쉬움을 놓고 날아가 버렸다.
기억나지 않는 숫자를 붙잡고 그래도 길몽이라며 복권을 사러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리석음과 비루함이 뒤섞이니 측은함과 허탈함으로 뒤따라 온다.

타인의 꿈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인용하며, 너의 무의식이 이러한 꿈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떠들면서 내가 꾸는 꿈은 선조로부터 내려온 신령한 꿈이길 바란다. 타인의 운은 그저 확률이라고 떠들면서 나의 운은 운명적이길 바란다.
가소롭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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