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만남
이성과의 ‘만남’은 불확실성을 담보로 한다. 그래서 다른 의미로 기대를 하게 된다. 확실성이 안정적인 것에 비해 진부하다면 불확실성은 예상치 못한 놀라움과 즐거움을 줄 때가 있다.
점심시간 일식집의 다찌형(카운터석) 테이블에서, 당근으로 잡은 중고거래의 자리에 일찍 나가 기다리며, 서울로 올라가는 KTX좌석 옆자리에 앉는 이성을 보면 뜻하지 않은 만남들에 대한 유치한 상상을 하게 된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불확실성은 나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요소로 자리잡지만 이성과의 만남에 대한 불확실성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물론, 원치 않은 소개팅이나 주선의 경우에는 그러한 불확실성은 설렘이 아닌 불편함이 되곤 한다. 하지만, 억지로 나와서 불편함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며 냉소적으로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도 두근거림의 감정에 휩싸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즉, 우리는 무관심한 척 혹은 냉소적 인척 하지만 상대에게 격정적으로 휩싸이는 나 자신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연적 다시 말해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어.” , “ 나는 너를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혹은 “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서 이 길을 걸어왔어.”
운명이라는 언어가 주는 무게감과 신비함은 나와 상대의 만남이 필연적인 것이라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평범한 만남에 운명이라는 단어를 떨어뜨림으로써 특별함을 피워내게 된다. 그리고는 사피어 워프의 말에 따라 운명이라는 단어가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만남을 운명으로 묶는 순간 기억들은 재조립되고 그때 들었던 노래, 입었던 옷, 맡았던 향기는 성스러운 성물처럼 받들어지며 시간이 지날 때마다 둘 사이에서 회자된다.
‘더 이상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혼자 집에서 시켜 먹는 배달음식이 반복되는 만남의 실패보다 더 지겹다. 실패한 만남이 있을까? 당장 그 자리에서 혼인신고를 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세계를 엿보는 모든 행동에 실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기대와 맞지 않는 만남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의 구조속에서 이성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그리는 것은 그것조차 그리지 않는 삶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