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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n 05. 2018

나를 데리고 잘 살기 위해 알아둬야 하는 디테일들

나를 구석구석 알차게 활용하고 싶다 메이드 백과사전

SNS를 보다가 주문하는 게 무서워서 S 샌드위치 전문점 에 못 간다는 사연을 봤다. 참고로 S 브랜드는 빵부터 안에 들어가는 재료, 소스까지 손님이 직접 골라야 하는 곳으로, 매장에 가면 여러 가지 질문을 받게 된다. “빵 종류는 네 가지 있는데 뭐로 하시겠어요? 빵은 구워드릴까요 그냥 드릴까요? 채소는 어떻게 넣어드릴까요? 더 추가하실 재료 있으세요?” 등등. 그 사연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고작 샌드위치 주문하는 것도 무서워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거냐’는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주문이 무섭다는 글쓴이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한때 내게도 비슷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적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 품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커피, 와인, 향수, 재즈가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드립 커피 메뉴가 있으면 일단 긴장부터 했었다. “난 커피 잘 몰라서. 그냥 아메리카노 마실게”라고 이야기할 때(사실 나도 드립 커피 좋아한다. 안 신 거!). 어떤 와인을 좋아하냐고 묻는 상대에게 “와인은 잘 모르니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답할 때(레드보단 화이트가 더 취향이긴 하다. 좋은 와인에 대한 개념이 없을 뿐). 취향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만)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모양이 빠지던지.


가끔 운 좋게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나 분위기를 바꾸어놓을 만큼 근사한 재즈곡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좋음의 감각은 대체로 순식간에 지나갔고 선택의 순간이 되면 나는 또 “이건 내가 잘 모르는 거라. 알아서 잘 선택해줘”의 입장을 취하곤 했다.


문제는 내가 잘 모르는 주제에 취향은 까탈스러운 인간이라 남이 골라준 것엔 만족을 못한다는 거다. ‘아, 그때 진짜 맘에 들었던 것 있었는데.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쉬워할 때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뭔가를 소비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 경험이 기껏 가르쳐놓은 삶의 노하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우연히 닿은 좋은 걸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나쁜 선택을 반복하다 보니 삶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전에 시켰을 때 입에 맞지 않았던 메뉴를 또 시키고, 만나고 나면 매번 마음이 가난해지는 모임에 계속 나가고, 몸을 아프게 하는 습관(이를테면 빈속에 생라면 먹기라든가. 그렇게 먹으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체하는데, 번번이 생라면에 손을 댄다)을 지속했다.


지금의 인생을 너무 사랑하지만 이십 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문득 배를 움켜쥐곤 한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좋음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지 정확히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인생이 불만족스럽다고 징징거리느라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이 통째로 날아갔다는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좀 더 능동적으로 내게 맞는 삶의 양식을 찾아뒀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은 많고 딱히 할 일은 없는 시절 그거라도 해놨으면 훨씬 더 많이 웃으며 살았을 텐데.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을 꾸리는 즐거움을 뒤늦게 알아챘다.


어린 시절 책등이 닳도록 펼쳐 읽던 동식물 백과사전을 느닷없이 떠올린 건, 초저녁잠을 자다 깨서 다시 잠들

지 못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동물 혹은 식물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그의 속성, 취급 방법 따위가 적힌 책을 나는 참 재밌어했다.

늑대는 개와는 달리 꼬리를 항상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꼬리의 방향으론 그의 기분을 알 수가 없다는 것. 휴식하는 시간이 거의 없고, 자는 것처럼 보일 때도 실은 가수면 상태라는 것. 또 늑대가 전속력을 다해 질주할 때는 표적이 된 먹이를 잡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라는 것. 늑대와 함께 살 게 아니라면 딱히 알 필요가 없는 시답잖은 정보들이었지만, 언젠가 늑대를 만나면 꼭 써먹으리라 다짐하며 읽고 또 읽었다.


그날 밤에, 나라는 존재도 백과사전 형태로 정리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속성이나 취급법,

디테일을 쉽게 잊어버리니까. 문서 형태로 만들어두면 두고두고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관찰력이나 기억력은 부족한 편이지만, 매일 일기를 쓰는 별종으로서 성실하게 기록하는 일만은 자신 있었다. 어떤 사실은 기록되는 것만으로 가치가 생긴다. 기록된 내용은 기록되지 않은 내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처럼 느껴진다(최소한 나에겐 그렇다). 그러므로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분리수거 하기’, ‘메일에 답장하기’ 같은 일정은 달력에 표시까지 하면서, 왜 나에 대한 디테일은 아무렇게나 놓쳐버렸는지.   


메모 앱에 ‘self made 백과사전’ 폴더를 만들고 당장 떠오르는 나에 대한 정보들, 나를 데리고 살 때 알아두면 좋을 팁을 쭉 나열해봤다.


✔ 약간의 폐소 공포증 증세가 있다. 비행기를 탈 때는 창문 쪽 말고 복도 쪽 자리를 예약해둘 것. 노을 보겠다고 창문에 앉았다가 숨 막혀 죽을 뻔한 적 있음.
✔ 단 음료를 먹으면 속이 뒤집어진다. 가끔 기분 내겠다고 크림이 듬뿍 올라간 음료를 시킬 때가 있는데. 그러지 말자. 얌전히 블랙커피를 마시자.
✔ 별것도 아닌 일로 난 짜증에 잡아먹힐 것 같을 때 유용한 처방: 따뜻한 물에 샤워하기, 햇볕 쬐기, 맥주 한 캔 마시며 걷기
✔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외로운 날이 상처받기 가장 쉬운 날이다. 가능하면 집에서 혼술하기. 사람이 너무 그리우면 차라리 술 먹는 사람이 나오는 유튜브 영상을 볼 것.


‘와우! 엄청난 자의식 과잉이야. 누가 볼까 무섭군.’ 고 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한편으로 재밌었다. MBTI 검사나 요즘 유행하는 유형 테스트(나의 성격과 닮은 연예인이나 동물을 추천해주는) 결과지에 나를 끼워 맞추는 일보다 백 배쯤 흥미로웠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 자신을 분석해주기 를, TMI에 불과한 정보들을 소중히 기록해주기를 바라는 걸지도.


놀이 삼아 슬슬 적다가 더 이상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카테고리별로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이건 음식 관련된 것, 이건 인간관계에 관련된 것, 이건 음악 취향에 관련된 것. 위키백과처럼 정보를 검색하고 추가하기 편하도록 공들여 정리했다.


참고로 백과사전 만들기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으로(생각보다 끈기가 좋은 편이다), 일상에서 좋거나 싫은 찰나의 감정이 스칠 때마다 메모 앱을 열어 성실히 기록하고 있다.


✔ 입에 맞는 원두 목록: 콜롬비아, 브라질, 그리고 오늘 먹은 만델링 추가. 아이스로 먹어도 맛있음. (최종 수정일: 2018.07.13.)


실제로 작업을 해보니 예상치 못한 효능도 하나 있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주섬주섬 백과사전 폴더를 열어 현재 상태를 기록하다 보면 뭐 이딴 걸로 짜증을 내고 있나 싶어서 괜한 심술이 가라앉았다.


✔ 꽃다발이나 화분을 안고 대중교통 타는 거 힘들어함. 식물은 도보로 이동 가능한 꽃집에서 사자. (최종 수정일: 2019.02.09.)


일상의 빈틈에서 ‘나 백과사전’을 읽는다. 나를 기록해둔 것인데도 어느 대목에선 새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었나?’ 싶다가도 또 한심할 정도로 둔감하다.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인데도 완전히 다른 태도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나를 입체적으로 이해해가는 과정이 즐겁다. 관성에 따라 늘 해오던 대로 나를 해석했다면 권태로워서 일평생 데리고 살기가 괴로웠을 것 같다.



언젠가 내 마음속 섀도복서(특징: 매사 부정적이며, 중요한 순간에 ‘왜’라는 화두에 매달려 될 일도 안 되게 함)가 물었다.

“왜 나 자신을 알아야 하나요? 왜 나의 디테일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나요? 그냥 망각하면 망각한 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안 되나요?”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하면 절대 질문을 거두지 않는 끈질긴 놈이므로 성의 있는 답변을 준비해본다.

이왕 나로 태어난 인생, 나를 구석구석 알차게 활용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누리며 살고 싶다. 무기력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스스로를 달래두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찰나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기록해서. 좋은 건 삼키고 싫은 건 뱉으면서. 남은 인생은 요령 있게 살기로 나랑 약속했다.


자신의 삶에 능숙한 사람들을 동경한다. 내가 아닌 무언가, 내 것이 될 수 없는 이상을 좇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인생 말고. 나를 섬세하게 살피며 스스로에게 필요한 배려를 놓치지 않고 살고 싶다. 재미 삼아 만들어본 백과사전이 그 바람을 이루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누군가와 새롭게 연애를 하게 된다면 이 백과사전 링크를 공유해줄 텐데. 나만큼이나 나를 잘 아는 남편에겐 이 기록물이 딱히 쓸모없을 것 같아서 아쉽다.



신간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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