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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n 16. 2021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쓰는 글엔 진심인 사람이 되어야지

여의도에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5호선을 타고 출근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가야 하는 직장인들이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 서 있었다. 속으로 ‘이러다 큰일날 텐데’라고 열 번쯤 궁시렁거렸을까. 세 개의 호선이 겹치는 환승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겨우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내내 흘려들었던 하차 안내 방송이 귀에 꽂혔다. 


“…여러분 좋은 하루가 모여서 좋은 인생이 됩니다. 오늘 하루도 좋아하는 일하시면서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금 정차한 역은 서대문, 서대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따뜻하신 분이네. 듣고 있던 음악의 볼륨을 조금 낮췄다.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역에 도착했고 이번에도 기관사님은 하차 안내 방송과 함께 토씨가 약간 달라진 덕담을 전했다. 아마 내가 이 열차의 특별함을 눈치채기 전부터, 아니 내가 이 열차에 타기 전부터 이런 방송을 계속해오신 거겠지. 출근 전 승객들에게 전할 좋은 말을 고르는 기관사님을 상상하니 술에 취한 것처럼 마음이 스르륵 풀어졌다. 무용한 것, 당장의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에게 나는 예전부터 약했다. 


달뜬 기분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마침 주말에 본 드라마 이야기로 대화가 활발히 오가고 있었다. 

“얘들아 훈훈한 얘기 하나 해도 돼? 나 지금 지하철 타고 출근 중인데 기관사님이 문 열릴 때마다 덕담을 해주신다? 방금은 ‘행복해지는 법은 간단합니다. 하기 싫은 걸 줄이고, 하고 싶은 일을 많이 하면 됩니다’라고 해주심.” 

친구들은 내 옆자리에 타고 있는 것처럼 금방 이야기에 몰입해주었다(늘 비슷한 포인트에서 감동하는 걸 보면 이러니 우리가 친구지 싶다). 지아가 우리끼리 감동하지 말고 기관사님에게 메시지를 보내자고 했다. 자기가 겪어보니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아침에 감사 인사 한마디 받으면 그렇게 힘이 된다고. 지하철 민원 신고 넣는 번호가 있으니 거기다 문자를 보내면 되지 않겠냐고 다들 앞다투어 아이디어를 냈다. 이런 문자를 한 번도 보내 본 적이 없어서 주춤했지만 내릴 역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용기를 내서 메시지를 썼다.  


“기관사님 지금 열차 타고 있는 승객입니다. 좋은 말씀 전해주셔서 월요일 아침 기분 좋게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하루가 되시기를. 늘 건강하세요.”


“답장이 오진 않겠지?” “아무래도 운전 중이시니까. 근무 끝나고 기메(고등학교 친구들은 날 이렇게 부른다)가 보낸 문자 보고 웃으셨으면 좋겠다.” 종알거리며 훈훈한 사건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답장이 왔다. 


“고객님 시간 내어 격려의 말씀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혹 몇 호선 어느 열차인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파악하여 부서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옆 칸으로 이동하는 통로 문 위에 칸 번호가 있습니다. 현재 도착역과 가는 방향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중앙 콜센터에서 온 문자였다. 그러고 보니 문자가 기관사님에게 바로 연결될 리가 없었다. 민망함을 담아 열차 정보를 보내니, 기관사님께 꼭 전달하겠다는 답장이 다시 왔다. 하루에 몇백 건 이상의 민원을 처리하는 사람이, 특별한 목적도 긴급한 용무도 없는 메시지에 진심으로 답해줬다는 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감동했다. “서울메트로 직원들 승객들한테 진심이네.” “훈훈 터진다. 저런 분들은 회사에서 휴가라도 더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주겠냐. 진심이라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에 진심이다”라고 말한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쓸데없는 데 진심을 다하는 사람을 아주 좋아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들은 늘 한결 같다. 맥주에 진심인 동네 양조장 사장님은 한 치의 타협 없는 맥주만 만들어 파신다. 그렇게 열심히 만든 맥주니 좀 비싸게 팔아도 좋으련만. 더 많은 사람이 맛있는 맥주를 마시길 바란다며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신다. 고객의 헤어스타일에 진심인 나의 단골 미용실 실장님은 불필요한 시술은 절대로 해주지 않는다. “저 파마 할 때 된 것 같아요” 하고 찾아가도 본인 판단에 때가 되지 않았으면 다시 돌려보내신다.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돈을 벌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고집스러운 태도에 믿음이 가서 5년째 그 미용실만 간다. 


삶에 진심인 사람들을 이렇게나 좋아하면서 정작 나는 무언가에 진심이었던 과거를 자주 후회한다. 어차피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거 열심히 하지 말걸. 괜히 진심으로 매달려서 상처만 받았네. 다음번엔 대충해야지. 멋없는 다짐을 할 때도 있다.


그렇게 내가 텅 빈 인간이 되려 할 때마다 진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별똥별처럼 나타난다. 밤의 캄캄함을 믿고 꼬질꼬질한 마음으로 글을 쓰던 나는 그 밝고 근사한 빛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뒤늦게 화장실로 달려가서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그제야 떳떳한 기분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쓰는 글엔 진심인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는 밤이다. 비구름이 달을 가려버렸으나 별똥별이 있어 밝은 밤이다.



신간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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