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잘해준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상처 준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 뭐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좋은 사람’의 기준에 얽매여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속담을 처음 알게 된 게 몇 살 때였더라. 학원 선생님이 ◯◯이 오늘 학원 왜 안 왔는지 아냐고 묻길래 “◯◯이랑 이제 안 친해요. 걔가 저번에 애들이랑 싸울 때 제 편 안 들어줬단 말이에요”라고 대답했다가 민망을 당했던 건 기억난다.
잘해줄 때만 친하게 지내다가 서운하게 좀 했다고 돌아서는 건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며 선생님은 표정을 굳혔다. 그 순간을 꿈으로 여러 번 꿀 정도로 나는 그날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모를 만큼 어렸을 적 일이라 그때 느낀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기억해두진 못했지만, 영혼에 얼룩을 남긴 사건임은 분명했다. 선생님에 대한 원망보단 옹졸한 속마음을 모두에게 들켜버렸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마음의 그릇이 작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내게 콤플렉스가 됐다. 이론상 ‘진정한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거라던데. 나름대로 애를 써봐도 진정한 마음이 안 생겼다. 나에게 있어 마음이란 유리컵에 담긴 물의 온도처럼 순간적인 감정에 가까웠다. 다정하게 대해줬다는 이유로 먼저 손을 덥석 잡았다가도, 상처되는 말을 들으면 금방 놔버리고 싶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두려웠으므로. 아닌 척, 다시 좋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일단 버텼다. 나는 속이 좁은 놈이니까. 내가 오해한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작은 일에 의미 부여하지 않겠지. 성급하게 관계를 끊거나 싫은 티를 내면 분명 후회할 일이 생길 거야. 어린 시절의 학원 선생님처럼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고, 상대와 어떻게든 다시 잘 지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 미워하는 마음은 반항이라도 하듯 점점 더 커다랗게 자랐다. 회복할 만한 구석은 없을까 이리저리 뜯어볼수록 상대방이 더 싫어지기까지 했다.
사랑이랑 미움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나는 사랑을 응원하지만 안타깝게도 승자는 미움인 것 같다. 미워하는 마음의 영향력이란 정말이지 지독해서 뭔가를 미워하는 동안에는 사랑을 할 틈이 없다. 종일 화내고 원망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정작 내 몫으로 주어진 사랑을 받아먹지도 못한다.
역시나 일상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몇 주 전 월요일. 씩씩거리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데 메신저 알림창에 반가운 이름이 반짝였다. 은유였다. 은유는 내가 종이 잡지를 만들던 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이고,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음악 배급일을 한다.
“혜원님, 혹시 택배 하나 못 받으셨어요? 여섯 달 전에사둔 선물이 있는데 올해가 지나기 전에 드리고 싶어서 우편으로 보냈거든요. 벌써 도착하고 남을 시간인데 분실되었을까 봐….”
메시지를 읽고 서둘러 현관으로 나가보니 묵직한 상자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문자 알림을 꺼두어서 3일 전에 도착한 택배 도착 문자를 놓쳤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대단한 일’ 한다고 3일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살았나. 볕도 안 쬐고 만날천날 노트북 앞에 앉아서 화만 내며 살았다는 게 새삼 부끄러웠다. 늦었지만 멀리서 나를 기억해준 다정한 마음에 답장을 보내고 싶어서 오랜만에 서랍을 열어 엽서를 고르다가, 제때 보내지 않은 답장이 이번 것 말고도 여러 건 밀려 있음을 깨달았다. 친구가 이거라도 챙겨 먹으라고 보내준 영양제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방바닥을 굴러다니고,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로 깜짝 선물을 받아놓곤 고맙다는 인사조차 아직 안 했다. 코로나가 우리를 갈라놓은 이 시국에도 사랑하는 친구들은 메신저로 택배로 다정을 전해오는데, 나는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느라 그 고마운 애들을 내팽개치고 살고 있었다니. 속상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었다. 단 건 삼키고 쓴 건 일단 뱉기로. 어중간한 마음으로 모두를 품어보려 애쓰다가 소중한 사람을 놓치느니 그냥 생긴 대로 살기로 한 것이다. 그래요. 나 옹졸하고 ‘찌질한’ 사람 맞아요! 나한테 오늘 잘해준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상처 준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 뭐.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좋아하는 일을 가능한 한 많이, 싫어하는 일을 가능한 한 덜 하며 살라는 말도 있잖아? 껄끄러운 사람은 내 시야에서 최대한 멀리 치워놓자!
의식이 여기까지 흐르니 가장 먼저 SNS 팔로잉 목록부터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의 소식을 꼬박꼬박 보는 게 그간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이름만 봐도 입맛이 쓴 사람을 찾아 언팔로우 버튼을 누르려는데, 막상 저지르려고 보니 망설여졌다.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뒷말이 나오진 않을지, 만에 하나 우리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은 없을지. 10분 넘게 머뭇거리다 용기 내서 팔로우를 끊었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사람은 이미 나를 언팔로우 해둔 상태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걔를 미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옅어졌다. 남이 되니 이렇게 편한 것을. 진작 뱉을걸.
언젠가 친구들과 배달 음식을 기다리며, 소개팅 상대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마음이 식는지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정말 시답잖은 이유로 누군가를 밀어냈다. 겨울에 너무 추워해서(이를 딱딱 부딪치며 떠는 게 멋이 없어 보였단다). 버스에서 과도하게 휘청거려서(그 모습을 본 뒤로 개업식 풍선 인형이 겹쳐 보였다고). 카레에서 당근을 빼고 먹어서(어른스럽지 않다고 느껴졌단다).
그 사람을 다시 보지 않기로 한 하찮은 이유를 듣고 있자니, 미움이란 감정도 우연의 영역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미리 조심할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우연. 그러니 괜한 의미 부여 말고 미운 감정이 생기면 미련 없이 마음에서 뱉어버려야겠다. 안 그러면 도리어 미움에 잡아먹히게 될 테니까.
| 인스타그램 팔로잉 정리 후기 |
팔로잉 정리를 마치고 내 인스타그램 피드를 다시 봤는데 정말 가관이다. 보는 눈이 많으니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은유적으로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단어 하나하나에 날이 서 있는 게 누가 봐도 화가 잔뜩 나 있다. 며칠 전 류시화 시인이 올린 글이 떠오른다. 세상은 싫어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 둘로 나뉜다고. 우리의 에너지는 우리가 집중하는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니 기왕이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자는 이야기였다. 그의 글을 일기장에 옮겨 적으며 한 가지 다짐을 덧붙였다. 내년부터는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더 자주 쓰자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데 에너지를 몽땅 다 써버리고 미워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버리자고. 마침 때는 다짐하기 좋은 한해의 절반이다.
신간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