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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11. 2018

내가 내 인생을악마의 편집을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끔 친구들에게 “다음 생엔 뭘로 태어나고 싶냐?”고 묻는다. 답변에는 무생물을 포함하여 다양한 것들이 등장하는데, 지친 얼굴을 한 채 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애도 있었다. 돌처럼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고, 작달비가 내리든 함박눈이 쌓이든 상관 않은 채 맘 편히 있겠다고. 사뭇 진지하게 말하던 표정이 마음에 남았다. 그런 친구를 위로하기가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괜히 얄궂은 장난을 쳤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퍽이나 편하게 있겠다. 가람이나 나 같은 사람 은 돌로 태어나봤자 흔들바위일걸? 흔들바위 알지? 365일 관광객들이 찾아와서 하루 종일 밀어대는 그거.”


농담처럼 말했지만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 또한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편해질까’다.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며 바깥 세계의 속도에 맞춰 휘청거리는 게 이제 좀 지겹다. 누가 부귀영화(혹은 연금복권)와 마음의 평화 중 뭘 택할 거냐고 묻는다면, 지금 같아선 대뜸 마음의 평화를 골라버릴지도 모르겠다. 정신 승리라도 좋으니 스트레스 없이 지내고 싶다. 어떤 근육이든 심하게 쓰면 망가진다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폭염과 한파를 오가는 내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을 게 분명하잖아. 당장 내일 고장 나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이런 연유로 죄 없는 마음에 돌을 던지는 놈들을 골라내 단두대(!)에 올리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최근에 유력한 용의자로 ‘제발’이라는 놈이 체포됐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내가 꽤 자주 ‘제발’을 찾는 사람이란 사실도 알게 됐다. 


‘제발’을 말할 때의 나는 대체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바라왔던 것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는데, 그걸 손에 넣을 능력이 없고. 내세울 거라곤 간절함뿐이어서 구차하게 매달려야 하는 초라한 처지. 그래서 평소엔 거들떠도 안 보던 신이나 달님을 찾으며 ‘제발’을 외치는 거다. ‘제발. 이번엔 꼭 붙게 해주세요. 이거 안 되면 저 죽어요.’, ‘제발 그 사람 한 번만 더 만나게 해주세요. 앞으로 진짜 착하게 살게요.’ 제 3자의 눈으로 가만 보니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필사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인생을 구원해줄 한 방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눅눅한 일상을 단번에 뽀송하게 만들어줄 햇살 같은 사랑이나, B급 인간 을 A급으로 만들어줄 성취 같은 게 있다고 믿었으니까.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도 이 기회가 그 한 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새 ‘이거 아니면 안 돼’의 심정이 돼버렸다.


어떤 것도 어떤 것에게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취직을 한다고 해서, 사랑을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진 않는다는 걸. 무엇보다 일단 지나고 나면 생각보다 금방 잊히는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걸. 내내 모르고 지내왔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흐릿하지만 글 쓰는 일에 집착하게 된 과정도 비슷했다. 어쩌다 한 번 칭찬을 들은 일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쓰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결론에 닿기까지. 거기에 목숨을 걸 정도로 거창한 이유가 있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납작한 관점은 수시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극단적인 생각(또 떨어지다니. 나는 쓰레기야. 이것도 못할 거면 그냥 죽자)을 했다. 잘하고 싶어서. 근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되어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차라리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너무 간절해서 영영 놓아버릴 위기에 처했던 때, 그러니까 잡지사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식음을 전폐하고 방구

석에 처박힌 일이나, 기사 몇 개가 망했다고 에디터 일을 때려치우려고 했던 걸 떠올리면…. 지났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참 바보 같았다.


언젠가 네이버 뉴스 창에서 “김태리, 저도 언제 연기를 때려치울지 몰라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고 깜짝 놀라 눌러본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모두가 언제든지 자신이 하는 일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정답은 이거 하나뿐이다’라는 생각이 환기되지 않으면 삶이 너무 힘들잖아요. 저도 연기를 언제 때려치울지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오래 못할 것 같아요.”


몇 년 전이었다면 인터뷰를 보고 그녀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실패 후 도망칠 곳이 있는 사람은 가짜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태도를 배우고 싶다. 앞으로는 ‘이거? 좋아하는 거지만 없어도 죽는 건 아니야’ 정도의 온도로 살아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고장이 날지도 모르니까. 잘하고 싶은 것에 오래 머물기 위해서. 이제 그만 ‘제발’을 놔주어야지.


일러스트레이터 최혜령 作 @teummmm


| 제발 탈출 후기 |

이 글을 쓰고 나서 얼마 뒤에 한때 응원하던 래퍼의 영상을 발견했다. 어떤 팬이 그의 활약상을 모아 편집한 영상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고등학생 래퍼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봤다. 실력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하는 바람에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친구였다. 그가 가사를 잊은 채 당황한 모습은 서바이벌 쇼 특유의 악마의 편집을 거쳐 인터넷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그걸 보며 나는 수능 망친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되어 속상해했다. 그러게 잘 좀 하지. 중요한 무대를,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었다. 영상에는 경연에서 보여준 무대뿐만 아니라 방송 밖 모습(소규모 공연장에서 랩 하는 거, 친구들과 거리에서 비공식적으로 한 게릴라 공연 등)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었고, 그는 여전히 랩을 ‘잘’ 했다.  하나 재밌었던 건 영상 중간에 문제의 가사 실수 장면도 있었는데, 방송을 볼 때와는 다르게 그다지 심각한 실수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가 오른 수많은 무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가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지만, 곧이어 다른 무대에서 잘하는 모습이 나와서 별로 안타깝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운 기회를 날리긴 했는데, 실력 있는 친구니 언젠가 잘 되겠지 뭐’ 하고 넘길 수 있었다.


그동안 인생이 경연 프로그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기지 못하면 낙오되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것이 허무하게 날아가는 냉혹한 세계. 그 속에서 나는 경연 프로그램의 참가자이자 PD로서 익숙한 악마의 편집에 매여 있었다. 사소한 패배에도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하고, 부정적인 부분만 모아서 자꾸 돌려 봤다.


그런데 어쩌면 인생은 단 한 편의 TV 쇼가 아니라, 내가 오른 모든 무대를 담은 유튜브 영상에 가까운 걸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경연 프로그램처럼 8화 만에 끝나지도 않고, 등수를 매길 수도 없다. 준비가 부족해서, 실수를 해 서, 운이 없어서. 이번 쇼에서는 낙오했지만 그건 10분짜리 영상의 한 구간일 뿐이다. 전체를 다 보고 나면 아주 사소한 부분일 테다. 그 이후 다른 쇼에서 우승을 할지, 음원 1위를 할지, 진로를 바꿔 대박이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용기가 난다.


물론 내 인생이 시시한 영상일 수도 있겠지. 처음부터 끝까지 고만고만한 실수만 가득할 수도. 하지만 오늘의 

패배 앞에서 당장 위로가 되는 건, 다음엔 잘될 거라 믿음뿐이므로. 기왕이면 이런 태도로 사는 게 속도 편하고 좋겠다.


신간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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