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직접 경험한 이야기에 기대는 사람이 있고, 상상력을 발휘하길 즐기는 사람이 있다. 나의 경우 명백히 전자다. 상상력이 부족한 탓에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쓰지 못한다. 오래 생각해 와서 충분히 익은 이야기, 쥐어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내 얘기를 하는데서 글 쓰는 재미를 느낀다.
한동안 ‘냉장고 파먹기’라는 용어가 유행했었다. 따로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활용하는 일종의 살림 팁을 뜻하는 말. 음식의 종류는 오늘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글을 쓰기 위해 의자에 앉으면 냉장고 파먹기를 하는 심정이 되곤 했다(글을 쓰는 일과 음식을 만드는 일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쓰기에 관해 설명하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요리의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그 냉장고엔 오직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재료만이 들어 있기 때문에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야 왜 이렇게 재료가 부실해! 옆집 소라네 냉장고에 는 외국에서 가져온 아스파라거스도 있고 파스타 소스도 있던데. 왜 우리 집 냉장고에는 흔해 빠진 감자랑 된장뿐인 거야. 이래 가지고는 특별한 요리(글)를 만들 수가 없잖아!’
글쓰기를 업으로 꿈꾸기 시작한 후부터는 나고 자란 장소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주 떠올렸다. 프랑스에서 살다 온 친구 냉장고에는 우리 집엔 없는 버터가 들어있었고, 그래서인지 걔가 쓴 글은 내 글과는 다른 풍미가 있었다. 또 마을을 따라 작은 개울이 흐르는 시골 동네에서 틈만 나면 공상을 하던 애만 쓸 수 있는 글이 분명 있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 동네 인천은 무난하고 시시하게만 느껴졌다. 아파트와 학원가로 이루어진 네모반듯한 계획도시. 나는 거기서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재미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한국 사람의 절반은 수도권에 산다고 하니 아마도 내 또래 대부분은 나와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하며 자랐을 테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은 양날의 검이 되어 나를 안심시키기도 불안에 떨게 하기도 했다. 생활인으로서 나랑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반가웠다. 나 혼자만 하는 줄 알았던 못나고 찌질한 생각들을 실은 남들도 다 품고 있다는 걸 알아챌 때마다 묘한 위안을 받았다. 나만 이렇게 구린 건 아니구나. 다들 이런 상황에선 속물 같은 마음을 먹는구나.
그런데 글쟁이로서 내 맘 같은 글을 발견하면 이런 생각부터 들었다. ‘아, 또 한발 늦었구나.’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보다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를 또 써도 되는 걸까? 사람들이 과연 일기장에나 등장할 법한 시시한 서사를 책으로 읽고 싶어 할까?
글이 풀리지 않을 때면 괜히 굴곡 없는 성장 배경을 탓하며 시무룩해졌다(정확히는 굴곡이 없는 게 아니라 글로 쓸 만한 비범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긴 했지만). 사무실에 앉아 한참 업무를 보다가도 문득 불안해졌다. 내가 이렇게 속세에 찌들어 있는 동안 다른 작가들은 근사한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쌓아가고 있겠지. 그래서 한동안은 글감이 될 만한 특이한 경험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흉내만 내서는 아무것도 못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어떻게든 독자들의 눈에 들 만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만 쓸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한 강박은 조금씩 써 모은 글이 백 편 정도 모이고, 나에게 주어진 글감을 능숙하게 요리할 수 있게 된 후에야 겨우 옅어졌다. 그리고 얼마 전 싱어송라이터 빅베이비드라이버(이하 ‘빅베’)의 인터뷰를 읽다가 예전의 나에게 읽히고 싶은 에피소드를 발견했다.
영어 가사와 한글 가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는 답변 대신 ‘농담’이라는 노래를 만
들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노래의 가사를 쓸 때 한글로 쓸지 영어로 쓸지 고민하던 빅베는 결국 한글로 완성하기로 정한다. 그 결정에는 은퇴하고 취미로 서예를 하시는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한문 서예만 하던 아버지가 종목을 바꿔서 한글 서예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한자로 된 아버지의 작품을 볼 때는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 “음 서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단다. 근데 한글 서예를 하니까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됐고, 그제야 서툰 부분이 보이면서 작품이 귀엽게 느껴져 애정이 생기더란다. 그 체험을 통해 ‘그동안 내가 영어로 노래한 게 한자 서예 같은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부족한 부분을 낯선 언어로 대충 감추기보다는, 정직하게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수많은 뮤지션의 인터뷰를 읽어오면서 한글 가사와 영어 가사의 차이에 대한 문답을 자주 봤지만, 빅베의 저 답변만큼 와 닿는 것은 없었다. 평범한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만든 맥락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진심으로 멋져 보였다. 이거야말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퇴직 후 서예를 시작한 아버지를 둔 싱어송라이터만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니, 한글과 영어 가사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기에 한문 서예에서 한글 서예로 전향한 아버지의 작품을 본 사람만의 이야기. 거창하진 않지만 그 인생을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어쩌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나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시시하다고 무시했던 내 인생 안에 이미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세상에 평범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인생을 게으르게 해석했을 뿐.
인연이란 게 있는 걸까? 우리 팀 인턴으로 들어와 이제는 친구가 된 지원이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을 쓰기엔 제가 너무 평범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이슬아 작가님처럼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기라도 해야 할까 봐요.” 이 글이 그때 못한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나의 자아는 12인조 아이돌 그룹과 비슷하다’ 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인사성 바른 멤버 A도, 글 쓰는 멤 버 B도, 제 분을 못 이겨 이따금 소리를 지르곤 하는 다혈질 멤버 C도, 8년차 직장인 D도 모두 그룹의 일원, 즉 나라고. 그러니 인간의 입체성을 인정하자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사실 글 쓰는 자아를 특별히 애틋하게 여긴다(올 팬이 진리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그는 무심하지 않다. 평범하다고, 뻔하다고, 화려하지 않다고 무시하거나 지나쳐버리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심연 앞에 쪼그려 앉아서 더 나은 삶에 대해 자주 고민한다. 타인의 심연을 궁금해 하며 매달 10권 이상의 책을 사고 읽는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반짝임들, 생활의 때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보석들을 글로 옮긴다. 명예를 누리게 해 주지도, 부를 가져다주지도 않는 이 일에 시간을 들인다는 점에서, 나는 그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황정은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소설을 읽지 않아도 살지만, 소설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타인과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주어를 살짝 바꿔 이렇게 읽어본다.
‘사람은 글을 쓰거나 읽지 않아도 삽니다.’
맞다. 글이 없어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 그렇지만 글은 타인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도 글 쓰는 멤버가 한자리쯤 차지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는 작가 에세이를 이만큼이나 읽어낼 정도의 끈기라면. 일기를 쓰든 블로그를 하든 인스타그램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언젠가 여러분의 이야기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어디서든 와락 만나게 되기를 고대한다. 아무거나 말고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들어보고 싶다.
아침에 기상 알람을 껐는데도 계속 휴대폰이 울려서 봤더니... 브런치 카카오 채널에 제 글이 소개 되는 행운이 있었네요. 덕분에 월요일 기쁘게 시작합니다. 읽어 주시는 분, 댓글 달아주시는 분, 좋아요 눌러 주시는 분 모두 오늘 하루 5분이라도 기쁜 순간을 보내시기를 응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