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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16. 2019

오늘부터 '아무거나' 금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아무거나’로 퉁 치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으면

언젠가 친구가 “취향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평소 자주 쓰는 표현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정확한 뜻을 몰랐다.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친구는 무슨 에디터가 그런 것도 모르냐며 웃었다.

그날 우리가 대화를 통해 찾은 답은 이거였다. 특정 카테고리를 떠올렸을 때 좋고 싫음이 명확하게 나뉘면 취향이 있는 거.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면 없는 거. 이를테면 밀떡만 먹는 사람은 떡볶이에 취향이 있는 사람. 또, ‘부먹’을 질색하고 ‘찍먹’만 고집한다면 탕수육에 대한 취향이 있는 사람.


그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해보니 나는 대체로 모든 분야에 있어서 확고한 취향을 가진 인간이었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힙하거나 대단한 취향이 있다는 뜻은 물론 아니고, 그냥 뭘 보든, 듣든, 입든, 좋고 싫음이 확실했다. 옷으로 설명하자면, ‘멋쟁이’는 아닌데 자기 세계가 확실한 스타일이랄까. 그래서 정말 피곤하게도 직접 선별하지 않은 것에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자주 ‘아무거나’를 외치는 인간이기도 했다. 살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드는 시기가 종종 있었는데, 가만 보면 그런 시즌에는 어김없이 아무거나 먹었고(내 인생인데 점심 메뉴 정도는 내 마음대로 고를걸), 아무거나 입었으며(쇼핑을 할 시간과 기력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아무거나 보면서 시간을 버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재작년 가을 차를 타고 제주의 숲길을 달릴 때였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들을 보면서 별생각 없이 나아가던 중이었다. 내내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았으므로 휴가 기간만은 그 어떤 작정도 없이 다소 막연하게 지내고싶었다. 운전하던 김수현(남편 이름)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친 건, 반복되는 풍경에 급격히 심드렁해진 내가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던 찰나였다.

“헐, 여기서 바다가 보이네? 야, 휴대폰 보지 말고 이거 빨리 봐야 돼!”

모든 게 예상대로라고 착각한 순간에 만난 예상치 못한 풍경은 조금 느끼하게 표현하자면 미셸 공드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산 중턱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꼭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었고, 바다와 노을이 만든 공기의 색감은 아무리 좋은 필터를 써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근사했다.


김수현은 이런 순간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며 지금과 어울리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정도야 뭐! 문

제없지. 잔잔하면서도 너무 처지지 않고 해 질 녘과 잘 어울리는 노래 말하는 거지? 나는 자신 있게 재생 목록을 열었다. 열었는데… 음, 막상 어떤 노래를 골라야 할지 막막해졌다.

우선 최근 재생 목록엔 욕설이 난무하는 노래밖에 없었다. 그즈음 전투력을 높여야 할 일이 유독 잦았던 탓이었다(나는 힘들 때 힙합을 듣는다). 한편 만들어둔 지 한참 된 플레이리스트에는 몇백 번씩 들어서 이미 질릴 대로 질린 곡들만 가득 쌓여 있었다.

분명히 얼마 전 라디오에서 괜찮은 노래를 들었는데. 이럴 때 듣기 좋은 노래가 재생 목록 어디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렴풋한 감각만 남아 있을 뿐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휴대폰에 코를 박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창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중이었다. 평소에 플레이 리스트 좀 정리해둘걸. 뭐가 그렇게 바빠서 노래도 못 듣고 살았나. 뒤늦게 후회해봤자 꿈결처럼 예쁜 구간은 이미 흘러가버린 후였다.


행복한 매일이 모여 행복한 인생이 된다던데. 이렇게 불만족스러운 하루가 쌓여 불만족스러운 인생이 되는 건 아닐까. 새삼 걱정하던 시기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좀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었다. 미묘하고 까탈스러운 내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친구도, 가족도 아닌 오직 나 자신뿐일 테니. “인생이 도무지 만족스럽지 않다!”며 드러눕기 전에 스스로의 비위를 잘 맞춰줘야 했다.


일단 결심부터 했다(참고로 나는 매년 300번 쯤 새로운 결심을 한다). ‘아무거나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로. 한 번 사는 인생 아무거나 말고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며 살아봐야지. 그렇게 하기 위해선 먼저 내 취향의 방향이나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는 지도가 필요했다. 지금 내 마음속은 30년 동안 한 번도 정리하지 않은 창고 같은 상태일 테니까. 필요할 때 필요한 취향을 꺼내 쓸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아주는 작업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문제의 플레이리스트부터! 화났을 때 듣기 좋은 노래, 글 쓸 때 필요한 가사 없는 노래, 걸으면서 들을 산뜻한 템포의 음악까지. 상황별로 기분별로 섬세하게 나누어 정리해놓았다. 다시는 중요한 순간을 어울리지 않는 배경음악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또 두서없이 지도 앱에 저장해두기만 한 ‘가보고 싶은 장소’들도 상황별로 다시 분류해두었다. 모처럼 여유가 생겨서 어디든 가고 싶을 때.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덕분에 취향에 맞지 않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우울해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최혜령 作 @teummmm


이 책에는 취향은 있지만 그걸 적재적소에 써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내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는 취향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취향을 ‘정의’하지 못했을 뿐이니까. 괜히 주변 눈치 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지도 잃지도 말자고.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어가면서 나의 세계를 단단하게 만들어가자고. 스스로 에게 잔소리를 하는 기분으로 썼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은 밑그림부터 내 맘대로 그릴 수 있는 스케치북이 아니라, 굵직한 형태가 이미 잡혀 있는 컬러링북에 가깝다는 걸 잘 안다. 내 취향이 전혀 아닌 장소에서 혼자 있었다면 절대로 먹지 않았을 음식을 견뎌야 하는 순간은 앞으로도 자주 있을 것이다. 다만, 내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졌을 때, 스스로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아무거나’로 퉁 치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신간 <달면 삼키고 쓰면 좀 뱉을게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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