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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디아워스

나의 시간들은 어디로

2020년에 쓴 글을 발견

by 우엥

골프장쪽으로 통유리 창을 내놓은 중고서점이

회사 바로 옆에, 우리집에서 차로 십분거리에 있다.

퇴근 시간 막히는 도로를 피해 쉬었다 가기도 좋고

쉬는 날 놀러나와 하루를 온통 다 써버리기도 좋다.


경기도에 살기 시작하고,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많아졌다. 회사는 십삽분이면 도착하고

나의 아파트는 아직 사람들이 입주하지 않은 새 아파트들 사이에 둘러쌓여 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들릴만큼 고요하다.

소래포구 우리집은 저 멀리 핸드폰 매장에서 틀어 놓은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서 내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신고 했었는데, 그 매장은 여전히 음악을 크게 틀고 있다. 나는 음악을 크게 트는게 핸드폰을 파는데 어떤 도움을 주나요? 라고 날카롭게 묻고 싶은 마음을 접고, 그들의 생계와 계속해서 이어질 나날들을 생각하며 그 음악 소리를 우리집 풍경의 일부로 받아 들이기로 했다.



집도 회사도 쉬는날 놀러나오는 서점도

지하주차장이 널찍하고 주차비도 무료라서

주차 걱정은 해본 적도 없고, 6만원어치 기름을 채우면

500키로를 달리는 차로 두달에 한번 6만원어치 기름을 채우며 가성비와 여유가 넘쳐나는 시간을 살고 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면, 꽉 맞는 예쁜옷을 입고 분홍색 화장을 하고 살아야 할거라고 생각했고, 잘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런 내 모습이 예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또 맨얼굴로, 산지 5년도 넘은 옷들을 걸쳐 입고 동네 카페와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살고 있다. 크게는 아테네에서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른 건 아테네에서는 진짜 혼자라는 나쁘지 않은 느낌이 늘 있었지만, 여기선 진짜 혼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포근한, 조금은 귀찮은 어떤 것이 내 옆에 붙어다닌다.

사람은 어느 곳에 가져다놔도 자기다운 삶을 살게 되는구나라는 생각과, 내가 사는 동네나 나라의 다름은 생각과 감정의 재료가 될 뿐, 그 기저를 바꾸어놓지는 못 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날들이다.


요즘은 사는 게 너무 지루해요, 살다가 지루하면 어떻게 극복을 하나요? 라고 점심 시간에 만나는 적당히 친한 직원들에게 묻는다. 대답을 듣고 난 뒤의 나의 소감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될 만한 일들로 흔들리는 일상을 겪어내는 사람들은 축복 받은거야, 권태와 씨름하는 일상보다 훨씬 나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책에서는, 한 때 민주화 시위의 중심에 섰었던, 연하의 화가를 애인으로 둔 교수가 나온다. 교수는 적당한 집안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성실히 이수하고, 모두가 예상하는대로 교수가 된 사람인데 애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혁명과 역사의 아우라에 자신의 지식과 삶이 낡은 사전같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면 저기에서 결핍을 느끼고, 저렇게 살면 여기에서 결핍을 느끼는, 정말이지 참기 힘든 존재의 가벼움



산다는 건 꿈이고 환이다. 그런데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나는 이제 내가 그리스라는 나라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사람들이 그걸 듣고 우와 그리스요? 하고 놀라면 더더 어색하다. 그 놀라움에 걸맞는 이야기를 더 해줘야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움츠러들어서 그냥 그렇게 됐어요... 하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나에게는 이미 지나가 덮여진 막이기도하고, 그 이전에 내가 살았던 날들을 통째로 잡아먹은 듯한 파괴력에 거부감이 들기도한다. 그리스 살기 이전에도 나는 존재했는데 그리스 한 마디에, 박웅비=그리스로 귀결되는 듯한 대화의 흐름에 나는 더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길고긴 인생에서 딸랑 3년을 산 그 나라는 영원히 내 뒤를 쫓아다닐거고 나 또한 그 뒤를 졸졸 쫓아다닐테지만, 그리스라는 나라에 살았다는 것 말고는 나를 설명할 말을 못 찾는다는 것에 멍해질 때가 있다.

좋은건지 나쁜건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상 2020년 경에 써두고 저장해놨던 과거의 글이었다.

5년 전의 나는 내 인생에 그리스 모험기보다 더 멋진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저 서점도 그때쯤엔 참 자주 다녔었는데, 직장이 바뀌고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사진 한 장에 그때의 기분이 떠오른다. 저 풍광을 배경으로 정처없이 흘러가던 생각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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