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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g Mar 29. 2021

욱하는 아빠, 욱하는 딸

늘 화가 나 있어 보이는 아빠

다혈질.      


자주 들어 온 이 단어는 한 인격체의 결함을 말하기 보다는 기질을 나타내는 말로 갑작스럽게 앞뒤 가리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붙이는 인식표다. 다혈질인 사람의 가장 주된 특징은 ‘욱’하는 것이다. 자그마한 자극에도 보통 사람들처럼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일일이 불편해 하면서 크건 작건 자신의 불편을 표현한다. 그것이 작게 불평하거나 욕하는 혼잣말일 수도 있고 버럭 크게 화를 내는 것일 수도 있다.     

 

기질이 다혈질인 것과 다혈질로 인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폭발시켜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기질이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정당화될 순 없다.     


나에게도 다혈질 기질이 다분하다. 그렇지만 성숙한 지성인으로서 그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남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 표출은 잘 관리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취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온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론 허상이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날 것 그대로의 내 약점을 온전히 마주해야 하는 순간. 실오라기 하나 없이 까발려지는 순간.    

 

사랑스러운 두 딸이 태어나던 순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갓난아기 시절에는 무한한 사랑과 관용으로 모든 것을 다 포용했다. 작은 실수에도 부서질 것만 같아 애지중지했던 그 작은 생명체들이 조금씩 자라서 걷기 시작하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걸 쟁취하지 못하면 떼를 쓰며 목 놓아 울고, 하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려 들었다. 시간이 촉박한데 도와주기는커녕 이런 저런 이유들로 시간을 지연시킨다. 자야할 시간이 지났는데 얌전히 잘 생각을 하지 않고 장난을 치고 떠들며 돌아다니며 잠자리에 들기를 거부한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내 안의 분노가 튀어나왔다. 그 어린 아이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아이들 수준으로 정제되지 않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차분한 상태에서 그 때를 떠올리면 그런 작은 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런 화를 발산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가 그러는 모습을 내가 봤다면 그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나의 감추고 싶은 모습.     


화를 내고서 조금 시간이 흘러 감정이 가라앉으면 여지없이 후회를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나의 감정 폭발 트리거는 비슷한 사건들에 매번 한결같이 당겨졌고 화낸 후 후회하는 일이 반복됐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두 딸들에게 초보 아빠의 한계를 매우 쉽게 드러내곤 했던 것이다.     


나의 욱은 어디서 왔을까? 단편적인 시각적 기억을 증폭하여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느 날 아버지가 백화점에서 예쁜 체크무늬 셔츠를 사들고 오셔서 선물이라고 나에게 주셨다. 나는 새로운 걸 잘 못 받아들이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그 옷을 그다지 맘에 들어 하지 않았고 입기 싫다고 얘길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징징대고 투덜대기를 계속하던 중 아버지는 집에 있던 가위를 가져와서 내가 보는 앞에서 잘라버렸다. 입기 싫으면 입지 말라고, 다시는 옷 사주지 않겠다고 소리치시며 사정없이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누나가 대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누나의 성적이 맘에 안 들었던 것인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대화 끝에 화를 내시던 아빠는 누나가 공부하던 책들을 꺼내 와서 거실에 던지면서 다 불태우겠다며 버럭 화를 내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느 겨울 날 화장실에서 씻으며 어머니와 얘기 중이었다. 내 기억엔 어머니에게 대든 것도 아니고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일이나 상황에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난데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나에게 화를 내셨다.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오해했다고 나는 생각했고 혼나지 않을 상황에 혼나고 있어 억울했으나 화난 아버지 앞에서 얘길 꺼낼 엄두가 안 났다. 그 때 아버지가 열던 문에 부딪혀 밀리면서 옆구리를 다쳤던 기억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 일화들을 아버지에게 얘기하면 기억을 하고 계실까? 아마도 하나도 기억 못하며 이 얘기에 본인이 그랬을 것 같지 않다며 당황해 하실 거다. 아버지에게는 순간의 감정 표현으로 잊힐 사건이 자식에게는 평생 각인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끔은 다정한 자매♡

사랑스런 나의 딸들에게 나의 욱은 이미 각인되었을까?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게 되어 그들의 인생에 하나의 그림자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6살인 첫째가 4살인 둘째와 놀면서 가끔씩 버럭 큰 소리 칠 때가 있다. 그렇게 소리치는 거 아니라고 훈육하길 몇 번 하면서 저 모습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모습이었다. 예고 없이 바로 감정을 끌어올려 소리치며 발산하기: 욱.     

10년 가까운 연애시절과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기 전까지 큰 소리 한 번 낼 줄 몰랐던 아내가 육아를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나와는 다르게 금방 감정을 다잡고 아이들과 다시 차분하게 웃으며 교류하는 모습이 차이점이지만 나에게서 나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나는 이미 내 가족들에게 나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분출함으로써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변하고 싶다.”

    

아이는 부모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배우며 자라는데 이제부터라도 그런 행동을 버리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아빠와 남편이 되고 싶다. 딸에게 욱하지 말라며 욱하면서 훈계하는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변하면 아이도 변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런 성격이 자리 잡지 않았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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