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만화 『H2』에 나오는 장면이다. 17세의 히데오와 중년의 야구부 감독이 연습 전에 나눈 대화.
커피 사러 나갔다가 샤랄라한 데이트 복장을 한 대학생 커플을 보고 이 대사가 떠올랐다. 아마 한밭수목원에 벚꽃놀이 가는 길인 듯하다. 사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서로 웃고 있지만, 설렘과 어색함이 묘하게 공존한다. 손을 포개 잡은 모습도 어딘가 엉거주춤하다. 봄에 시작하는 연애라, 세상에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 그것도 다 한 때니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두라고 말해주고 싶다(꼰대력 무엇;;).
감독님 말씀처럼 나에게도 20대가 있었는데. 대학생 커플 그들과 똑같은 시절이.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이맘때 내가 자주 가던 곳은 경희대였다. 그 넓은 캠퍼스에 벚꽃이 만발하면 참 예뻤다. 마침 4월이면 학생회에서도 한창 신입생 사업을 할 때라, 안 그래도 들뜬 새내기들을 데리고 곧잘 갔었다. 마치 그 학교 학생들인 것처럼 말이다(ㅋㅋㅋ). 그러다 봄을 닮은 싱그러운 새내기 여학생과 사귀게 됐…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거는 우리한테는 있을 수가 없지. 벚꽃놀이에 데려간 신입생만 1개 중대는 될 텐데, 결국 안 생겼다(…).
그 시절을 추억하면 떠오르는 음악들이 있다. 물론 봄의 국민가요인 장범준의 <벚꽃좀비엔딩>도 있을 테고. 그 안티테제로서의 10cm의 <봄이 좋냐?>도 좋겠다만. 어쩐지 벚꽃이 흩날리는 이런 날에는 제이팝이 어울린다. 그것도 살랑살랑한 어쿠스틱 사운드로 무장한 모던록이.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도 함께 들으면 좋겠다.
오하시 트리오(大橋トリオ), <사쿠라(サクラ)>
제목부터 <벚꽃>이다. 며칠 전 올렸던 코부쿠로의 동명 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눈을 감고 들으면 잔잔한 바람을 타고 벚꽃이 흩날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후주 부분이 압권이다. 듣고 있노라면 온몸이 가벼운 봄바람에 실려서 너울거리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설레면서도 로맨틱한 아우라를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했는지. 이름은 트리오지만 모든 연주를 혼자 해내는, 똘끼 넘치는 이 양반의 재즈 바이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묭(あいみょん), <하루노히(ハルノヒ)>
아이유는 싫어하지만 비슷한 이름의 이 뮤지션은 좋아한다. 그런데 괜히 아이유와 이름이 비슷한 게 아니다. 실제로 아이묭은 케이팝 팬이라, 본명인 아이미(愛美)를 한국 느낌으로 바꿔서 예명을 지었다고 한다. 그녀의 최대 매력은 싱어송라이터로서 작곡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 곡도 전주부터 작정하고 봄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제목인 <봄날>과 찰떡인 기타 사운드다.
아이묭(あいみょん), <On a Cherry Blossom Night(桜が降る夜は)>
사랑해마지 않는 뮤지션이라 한 곡 더 올린다. 그만큼 아이묭의 어쿠스틱 사운드는 봄과 잘 어울린다. 곡의 제목도 딱 벚꽃놀이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이 곡은 어쩐지 볼빨간사춘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봄바람 같은 기타 사운드와 사랑스러운 보컬이 그렇다. 안지영과 듀엣하면 그 맛이 더 살 것 같은 곡이다.
스핏츠(スピッツ), <체리(チェリー)>
사실 봄이랑은 관련 없는 노래다. 가사 내용도 딱히 밝지는 않다. 하지만 그 경쾌한 사운드와 나른한 보컬만큼은 봄과 잘 어울린다. 제목인 체리도 왠지 벚꽃(cherry blossom)을 연상시키고. 오래전부터 좋아한 노래지만, 제목이 왜 <체리>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곡의 뻐렁치는 멜로디는 언제 들어도 몸을 감전시키는 듯하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들을 것 같은, 인생 제이팝 중의 하나다.
백넘버(バックナンバー), <수평선(水平線)>
사실 봄이랑은 관련 없는 노래다(2). 오히려 이 밴드의 히트곡 중에는 겨울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그래도 나는 이 곡을 처음 듣는 순간 봄이 떠올랐다. 봄은 화려하게 의미화되지만, 그 심연에는 깊은 슬픔이 침잠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게 봄은 그렇게 이율배반의 정서를 담지하는 계절이다. 그 지점에서 이 곡이 봄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곡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바로 위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들뜨는 봄날,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