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나를 시험하는 방식

by 배대웅

글을 쓰다 보면 곧잘 착각에 빠진다. 이제는 좀 익숙해질 때도 됐다고. 하지만 데뷔 3년 차 쪼랩 작가의 현생은 또 다르다. 최근 나는 초등학생에게 놀라고, 편집자에게 혼나고, 중고서점에서 인내심 테스트를 거쳤다. 글쓰기는 여전히 나를 참신한 방식으로 시험하고 있다.


초딩들이 준 문화충격


난생처음 초등학생 대상 글쓰기 강의를 다녀왔다. 글쓰기 세미나를 함께 했던 빛날현 작가님이 운영하는 독서모임에서 초청을 해주셨다.


사실 수락하면서도 부담이 있었다. 지금까지 강의는 전부 성인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면 수준을 어느 정도로 맞춰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오래전 가르쳤던 중학생 망나니들과의 PTSD도 떠올랐다. 하지만 “주말에 글쓰기 모임까지 할 정도면, 공부에 관심이 많은 애들일 것”이라는 희망회로를 돌려 보았다. 그래서 성인용 강의에서 매운맛만 살짝 빼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주제는 『연구소의 승리』 중 로스앨러모스연구소 파트.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과학자들의 수난, 맨해튼 계획, 원자력의 역설을 엮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충격. 아이들 대부분이 책을 읽어왔다. 그것도 “재미있었다”라고 한다. 얘들은 평소에 뭘 읽길래 이 책이 재밌다는 거지?


강의 후에는 과학의 양면성을 주제로 짧은 글쓰기를 해봤다. 그리고 두 번째 충격. 초등학교 6학년의 글에서 서론–본론–결론의 빌드업이 느껴진다. 게다가 다른 책의 내용을 인용해서 근거로 삼을 줄도 안다. 이게 바로 목동 버프인가 싶어서, 슬쩍 고급 기술을 투척해 보았다.


· 주장만 하지 말고, 예상되는 반론을 먼저 제시한 뒤 받아치는 방법

· 다수가 선택할 것 같은 입장 대신 전략적으로 반대 포지션을 취하는 방법


혹시 너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온다. 여기서 세 번째 충격. 역시 대한민국 사교육의 성지 목동답다. 일기장에 "참 재미있었다"만 무한 반복하던 내 초딩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강의 후 빛날현 작가님이 한마디 하셨다. “오늘은 어머니들 반응이 더 좋았어요” 그 말씀에 나도 정신승리를 해본다. 원래 강의는 아이들보다 학부모님 반응이 좋아야 성공한 거지.


편집자라는 이름의 킬러


강의 다음 일정은 출판사 대표님과의 미팅. 집필 중인 글쓰기 책이 진도율 60%를 넘어서, 중간 점검을 겸한 자리였다.


편집자와의 만남은 늘 쉽지 않다. 작가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편집자는 한 마디로 킬러다. 그들은 매의 눈을 가졌고, 글의 허점들을 헤드샷하듯 정확히 저격해 낸다.


이번 책은 콘셉트가 유독 많이 흔들렸다. ‘최소한의 논픽션 글쓰기 수업’으로 시작했다가, ‘거장에게 배우는 글쓰기 수업’을 거쳐, ‘자기만의 글쓰기 수업’으로 최종 낙찰됐다.


초고에 대한 대표님의 평가는 호평과 혹평 반반이었다. 늘 그렇듯 당근과 채찍을 세트로 주신다.


· 당근: "와 4장까지는 밑줄 칠 만한 명문장들로 가득하네요!" (여기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채찍: "그런데 5장부터 급 사회과학 서적이 되어버리는데요? 동기 부여로 업된 독자들이 사기당했다고 책 덮을 각입니다." (여기서 뼈가 바스러졌다.)


그러면 그렇지. 언제는 책 쓰는 일이 한 번에 쭉 가는 법이 있었던가. 『연구소의 승리』도 대략 이쯤에서 갈아엎었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이번은 낫다.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게 아니라, 고치기만 하면 되니까.


벌써 세 번째 책이다 보니, 이제는 내게도 “다음 책 기대돼요!”라고 말해주는 독자들이 있다. 그분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책을 안 내면 안 냈지,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책은 절대 내지 않을 것이다.


미팅을 마무리하면서, 대표님이 탁자를 쾅 치며 말씀하신다. “작가님, 글쓰기 책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랑 내야 돼요?” “네 그럼요. 제가 또 어디서 책을 내겠어요.”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신다.


인디언 기우제의 승리


최근의 소소한 기쁨 하나. 오랫동안 찾던 절판 도서 두 권을 구했다. 사실 나의 중고책 사냥법은 단순하다. “나올 때까지 검색한다”라는 인디언 기우제 메타. 그게 며칠 새 두 번이나 얻어걸렸다.


첫 번째 수확은 허버트 버터필드의 『근대과학의 기원』. 예전 글에서도 꼭 갖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 책이다. 이걸 무려 1974년 초판본으로 낚아챘다.


이 책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11만 원대라는 미친 몸값을 자랑한다. 나는 창원의 한 혜자로운 헌책방에서 단돈 1만 원에 겟했다. 주문 후 배송까지 품절 크리 뜰까 봐 숨 참고 기다렸다. 받아보니 상태가 생각보다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엄마 나 버터필드 먹었어!"


두 번째는 월터 아이작슨의 『벤저민 프랭클린 인생의 발견』. 같은 작가의 잡스와 머스크 전기는 중고서점에 넘쳐나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구하기가 어렵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돈만 있으면 쉽다. 중고업자들이 3~4배 가격으로 뻥튀기를 해서 올려놨기 때문이다. 알라딘의 이 책 리뷰란에서 그 자본주의적 행태에 대한 독자들의 분노를 엿볼 수 있다.


나 역시 비슷한 원칙이 있다. "과한 가격(정가의 1.5배 이상)에는 절대 응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희귀한 책에 환장한다지만, 호구는 아니라긔.


그러다 예스24 중고서점에서 새 책과 같은 가격에 뜬 매물을 발견했다. 우왓 스고이! 누가 먼저 가져갈 새라 주문 버튼을 광클했다. 포인트와 적립금을 탈탈 털어 2만2천 원에 겟. 표지는 없지만 내부는 깨끗하다. 이 정도면 대만족.


두 권 다 잘 간직했다가 딸에게 물려줄 거다. 아직은 책의 가치를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물론 그때 딸아이가 “아빠, 이거 당근에 올리면 얼마 받아?”라고 묻는다면, 그날로 호적메이트 재검토 들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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