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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22. 2023

인체를 직접 열어봐야 병을 고친다

해부학과 외과의사의 탄생

의학 드라마의 주인공은 대부분 외과의사다. 외과 전공의 저조한 인기를 생각해 보면 역설적이다. 주요 병원의 전공의 모집에서 외과는 거의 매년 미달한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왜 그렇게 외과를 좋아할까? 아마 말 그대로 드라마틱해서 일 것이다. 외과는 죽어가는 사람을 되살리는 곳이다. 그래서 이를 잘 연출한 수술 장면은 서스펜스를 극한까지 몰고 간다. 2007년 MBC에서 방영한 ‘하얀거탑’이 그랬다. 두 의사의 수술 배틀이 뿜어내는 흡입력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웬만한 스포츠 경기 결승전은 저리 가라였다. 그때 흘러나온 ‘B Rossette’은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상징하는 ‘Viva la Vida’만큼이나 마성의 BGM이었다.

하얀거탑 OST 수록곡 'B Rossett'은 아무 의학 관련 장면에 갖다 틀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마성의 BGM이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해 보면 수술이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 본질은 사람의 몸을 자르고 째서 망가진 장기를 뜯어고치는 일이 아닌가. 인체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정교한 기술이 없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이렇게 보면 외과 전공 지원율이 낮은 이유도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 자신의 판단에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드라마에서도 곧잘 다루듯 과실과 소송에 대한 부담도 크다. 그러니 직업적 소명의식이 없다면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외과의사는 존재만으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외과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의학에서 해부와 수술이 오랫동안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의학도 중세까지 철학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인체를 실험과 조작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러한 인식이 바뀌어 해부가 의학의 핵심 영역으로 성장한 것은 16세기 과학혁명부터다. 그 이전까지 인체에 대한 지식은 관찰 경험보다는 고대인들의 이론적 유산에 의지했었다. 



    

갈레노스의 권위와 유산

     

대부분의 서양 학문처럼 의학도 그리스·로마 시대에 시작되었다. 2세기 초반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Claudius Galenus)는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던 의술을 학문으로 집대성했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라면 역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더 영향을 미친 것은 갈레노스다. 갈레노스는 역사, 문학, 철학 등을 통틀어 희랍어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로 꼽힌다. 19세기 일부 복원된 그의 전집만 수천 페이지에 이른다. 갈레노스는 로마제국 5현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다만 당시 인체 해부는 가톨릭 교리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었다. 시대의 석학이자 황제의 주치의였던 갈레노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대신 갈레노스는 검투사들을 치료하며 인체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여기에 동물들을 해부한 경험을 결합하여 인체 구조를 유추했다. 의학을 철학처럼 사고했던 갈레노스는 단순한 경험의 축적보다는 기하학에서 쓰이는 치밀한 연역 논리를 더욱 중시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닮은 면이 있었다.


해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천 년이 넘도록 제대로 해부를 해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럴수록 갈레노스의 권위는 공고해졌다. 해부에 대한 금기가 조금씩이나마 풀린 것은 12세기부터다. 타살 의심자들에 대한 법의학적 해부가 일부 허용되었다. 14세기 흑사병이 온 유럽을 초토화하자 교황청의 후원으로 병의 원인을 찾으려는 해부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6세기까지도 해부학의 수준은 갈레노스 이론에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해부는 더 이상 금기는 아니었으나 학문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의학 연구가 손에 피를 묻히는 실험·실습 위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작업은 고상한 의학자보다는 천한 외과의사의 몫이었다. 아직 학문이란 고귀한 정신적 활동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의학자도 철학자나 사상가로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때의 의학 수업이란, 외과의사가 해부를 하는 동안 의사는 뒷짐 지고 서 있다가 책을 강독하는 식이었다.

 

직업적으로 의사와 외과의사도 엄격히 구분되었다. 두 개념의 영어 단어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몸의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physiology)에서 파생한 피지션(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의사를 뜻한다. 오랫동안 의사는 곧 피지션이었다. 피지션이 되려면 대학에서 생리학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아야 했다. 피지션은 환자를 주로 약으로 치료했다. 반면 외과의사를 뜻하는 서전(surgeon)의 어원은 그리스어 cheiros(손)와 ergon(일)의 합성어다. 이것이 라틴어로 chirurgus, 다시 영어로 surgeon이 됐다. 요컨대 서전은 ‘손 기술자’란 뜻이다. 수술(手術, surgery)도 결국 손 기술이란 뜻이다. 서전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생리학도 몰랐다. 아버지나 선배로부터 배운 칼 쓰는 기술로 환자를 치료했다. 게다가 그 칼로 면도와 이발도 해주었다. 그래서 이발사-외과의사(barber surgeon)는 하나의 직업으로 분류되었다. 서전의 지위는 제빵사나 양조업자와 비슷했다. 당연히 피지션은 서전을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 외과의사의 주특기는 방혈(blood-letting)이었다. 환자의 혈관을 침으로 찔러 피를 빼내는 시술이다. 지금 보면 황당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걸로 못 고치는 병이 없는 만능 치료법으로 각광받았다. 이 방혈에 쓰이는 침이 란셋(lancet)이다. 오늘날 의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저널의 이름이기도 하다.

란셋(lancet)은 1823년 창간된 가장 오래된 의학 저널 중 하나다. 역설적이게도 방혈 시술법은 이 저널이 창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베살리우스의 도발적 문제제기

     

16세기 들어 갈레노스 이론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로 인쇄술 발달로 갈레노스의 책들이 대중화되었다. 책이 많이 읽히면 내용에 의심을 품거나 검증을 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랬고, 갈레노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둘째로 르네상스를 거치며 실제 인체 해부가 성행했다. 실사구시적 지식인들은 인체를 이해하려면 직접 해부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와의 협업을 통한 해부도 제작이 유행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그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인 화가다. 그는 현대의 기준에서도 매우 정확한 해부도를 그렸다. 하지만 교황청은 정식 의사가 아니었던 다 빈치의 해부도를 출판 금지했다. 1,800장이 넘는 그의 해부도는 제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고, 200여 년 뒤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그러던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나온 그해,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책 한 권이 나온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라는 29살의 의사가 쓴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다. 이 책은 직접 인체를 해부해서 쓴 역사상 거의 첫 책이었다. 저자 베살리우스는 아주 구체적이며 독보적인 인체 해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갈레노스 저작을 읽으며 그가 인체를 해부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아차렸다. 이 점이 책을 쓰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베살리우스는 이 책에서 200여 곳이 넘는 갈레노스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총 7권(뼈, 근육, 혈관, 신경, 생식기, 흉부, 뇌)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독자가 직접 해부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저술의 중점을 두었다. 백미는 함께 삽입된 300장이 넘는 해부도다. 평소 베살리우스는 르네상스 지식인들이 그랬듯 해부도 제작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림이야말로 해부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해부도는 독일 화가 얀 스테판 반 칼카르(Jan Stephan van Calcar)가 그린 것이다. 정밀한 선, 원근법, 명암법 등의 기법을 활용해 인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표지. 당시 해부학 강의를 묘사한 것으로 기교가 뛰어나 미술적 가치가 높은 그림이다.

그럼 베살리우스는 어떻게 독보적으로 해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나? 그는 피지션 집안 출신이었지만 서전과의 구분을 거부했다. 어릴 때부터 곤충과 동물을 해부해 보면서 남다른 싹수를 보였다. 파리대학교로 진학한 이유도 이 학교가 해부 실습에 관대해서였다. 다만 해부할 시체는 늘 부족했다. 지금도 해부용 시체는 구하기 쉽지 않은데, 그때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베살리우스는 처형된 사형수를 빼돌리거나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구해왔다. 불법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구해온 시체는 뼈와 살이 분리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끓인 뒤 해부를 했다.



      

해부학의 성지, 파도바대학교

     

베살리우스에게 이탈리아 유학은 중요한 전기였다. 그 무렵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상업의 중심지여서 거대 자본이 모여들었다. 이탈리아의 자본가들은 15세기 인쇄술 혁명으로 쏟아진 책들을 사들였다. 자연히 새로운 학문을 금기시하기보다는 자유롭게 토론하기를 즐기는 학구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예 학자와 예술가들이 먹고살 걱정 없도록 돕는 ‘스폰서’ 부자들도 있었다. 갈릴레이를 후원한 메디치 가문이 대표적 예다.


베살리우스는 피도바대학교 의학부에서 공부했다. 파도바는 베네치아 공화국 치하에서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자유롭고 진취적인 학풍을 자랑했다. 덕분에 베살리우스는 마음껏 해부 실습을 할 수 있었다. 파도바 시 당국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재판관은 처형된 죄수의 시신을 보내주기도 하고, 실험 일정에 맞춰 처형 시간을 미루기도 했다. 그 결과 베살리우스는 초고속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3살에 파도바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베살리우스는 기존의 꼰대 의사들과는 달랐다. 해부가 여전히 경멸받던 시절, 교수인 본인이 직접 칼을 들고 해부 시범을 보였다. 이러한 파격적인 강의 덕분에 대번에 스타 교수가 되었다. 파도바는 물론 볼로냐, 피사 등에서도 그의 강의는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난과 질시를 더 많이 받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에서 갈레노스를 비롯한 선배들의 오류와 관념성을 비판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른도 안 된 애송이가 학계의 권위를 하루아침에 뒤엎으려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선배 학자들은 그를 학계에서 파문시키다시피 했다. 얼마 못 가 베살리우스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은퇴했다. 동료들의 집중포화를 견디기 힘들어서였는지, 학문적으로 이룰 것은 다 이뤄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주치의로 스카우트되었고 귀족에까지 올랐다.


베살리우스는 파도바를 떠났으나 유능한 제자들은 그대로 남았다. 특히 히에로니무스 파브리키우스(Hieronymus Fabricius)는 1594년 세계 최초의 해부학 전용 강의실습실을 만들었다. 그 구조가 상당히 특이하다. 마치 오페라 원형극장처럼, 맨 아래에 해부대가 놓여 있고 이를 둘러싸며 좌석이 층층이 올라간다. 위로 갈수록 역삼각형 모양으로 관람석 공간이 넓어진다. 따라서 높은 곳에서도 제일 아래층의 해부 실험을 잘 볼 수 있다. 해부학 강의를 한 편의 공연처럼 관람할 수 있는 셈이다. 이 실습실은 지금도 파도바의 관광명소로서 유명하다.

파도바대학교의 해부학 실험실습실에서는 공연을 관람하는 것처럼 해부학 강의를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관광명소로 남아 있다.

파브리키우스의 제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갈레노스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발견을 했다. 본래 갈레노스는 혈액이 간에서 만들어져서 정맥을 따라 신체 말단부에 가서 소멸한다고 했다. 혈액은 에너지와 같아서 세포에 양분을 공급하면서 소모되어 버린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몸은 소모된 만큼의 혈액을 꾸준히 만들어낸다. 그러나 하비는 혈액이 심장에서 나와 몸속을 순환하여 다시 심장으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그는 인체에 필요한 혈액량을 계산해서 이를 입증했다. 우선 심장의 실제 용적을 측정했다. 이를 기반으로 심장이 시간당 얼마만큼의 혈액을 동맥 속으로 펌프질해 넣는지 계산했다. 약 250kg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성인 남성의 몸무게를 80kg라고 가정하면 그 세 배를 훨씬 넘는 양이다. 인체가 음식물을 섭취해서 혈액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낸다고 볼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적은 양이 몸속을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오늘날에야 중학교 수준의 지식이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상식을 뒤엎는 발견이었다.



     

외과의사의 지위 상승

     

베살리우스와 하비를 거치며 의학은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확립했다. 때마침 유럽에서 과학혁명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무렵 의학의 주요 사건들을 과학혁명에 대입해 보면 서로 잘 맞아떨어진다.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의 책이 같은 해 나오고, 하비가 혈액순환론을 제창한 직후 이를 입증할 현미경이 발명되었다. 이는 의학이 과학혁명과 공명하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히 외과의사의 지위도 급상승했다. 이는 해부학이 의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것과 관련이 깊다. 외과의사도 기술자나 장인이 아닌, 과학적 지식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된 것이다. 17세기 이후 해부학은 의과대학의 핵심 커리큘럼이 되었고, 사설 교육기관도 많아졌다. 해부학 지망생도 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뛰어난 외과의사들이 배출되면서 직업적 이미지를 크게 바꿨다.

 

하지만 외과의사가 오늘날처럼 몸속을 자유자재로 수술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것은 마취제가 개발되는 19세기 중반에나 가능했다. 이 시기 해부학의 중심지로 떠오른 영국에서는 아주 중요한 책 한 권이 발간된다. 1858년 외과의사 헨리 그레이(Henry Gray)가 쓴 『Anatomy, Descriptive and Surgical』이다. 줄여서 『Gray’s Anatomy』라고도 부른다. 이 책은 해부학과 외과수술을 접목한 최적의 교과서다. 첫 출간 이후 15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교재로 쓰인다. 2020년에 무려 42판(edition)이 나왔다. 아마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알 것이다. 외과의사의 삶과 열정을(미드답게 복잡한 연애사도 함께) 다룬 인기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가 바로 이 책 제목을 중의적으로 쓴 것이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인공은 메러디스 그레이(Meredith Grey)인데, Gray와 Grey의 발음이 같은 데서 착안했다. 그래서 드라마에 이렇게 철저하게 외과적인 제목을 붙였다.

2005년 첫 방영된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는 의학드라마의 가면을 쓴 막장드라마로 악명이 높지만, 시즌 20이 나올 정도로 인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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