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의 꽃이 빅맥이듯, 집안일의 하이라이트는 설거지이듯, 헬스장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러닝머신 아닐까. 근육운동도 좋고 요가도 좋고 스피닝도 좋지만 나 같은 뚱땡이에겐 역시 달리기다. 헬스장에 입장하자마자 러닝머신으로 향한다. 구석의 트레이너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근력운동이 왜 중요한지, 러닝머신만 뛰어서는 왜 안 되는지, PT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공감이 가도록 알려주신 고마운 분이다. 근육운동도 꼭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생각하며. 스위치 온.
운동시간을 표시해주는 숫자가 뜬다. 달리기를 시작하면 이내 죽을 듯이 괴롭다. 숫자가 빠르게 올라간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러닝머신 위를 뛸 때마다 죽음의 숫자를 향해 달려 나가는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은 어차피 태어난 이상 죽지 않는가. 삶에 회의감이 들 정도로 숨이 차오를 무렵, 속도를 낮춰 걷는다. 하체에 쏠려있던 피가 뇌 쪽으로 공급되기 시작할 즈음. 러닝머신 위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운동이란, 죽음으로 향하는 무빙워크에서 역주행을 하는 것. 죽음의 숫자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일 터다. 오늘 1시간을 달리면 10분 정도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단지 조금 더 오래 살아보겠다고 운동을 하는 건 아니다.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여행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여행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옷 가게에 들어가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이 몸뚱어리로는 행복한 삶을 살기 힘들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가. 그러자 김영민 교수의 칼럼에서 읽은 글귀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맞는 말인 듯하다. 행복이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기쁨. 잠깐의 기쁨을 좇으며 우리는 얼마나 큰 불행을 겪고 있는가. 곧 익숙해져 버릴 날씬한 몸매의 기쁨을 얻기 위해 나는 왜 이렇게 달리고 또 달리는가. 행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길은 없는가. 이게 바로 나만의 자유론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60년 전에 자유론을 집필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정말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 나을까. 잘 모르겠다. 설령 그의 말이 맞다 쳐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낫지 않을까. 현실에 대한 합리화라면 나는 언제나 위대한 철학자들과 자웅을 겨루고 만다. 그게 개똥철학이라는 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