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호지방이 Aug 06. 2023

자가격리

 일기를 쓰기 힘들다. 하루하루가 늘 비슷해서다. 똑같은 하루를 기록하는 행위가 민망하다. 사는 게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삶은 단조롭다. 힘들지 않다는 게 아니라 재미없게 힘들다. 일상과 조금 다른 특별한 순간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찾아간다면 모를까. 그래서 여행들을 가는 걸까.   

   

 감수성의 폭이 좀 더 두터웠으면 좋겠다. 매일 가는 카페의 커피 맛이,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길이, 무심히 지나치는 공원의 풍경이, 마을버스의 이름 모를 사람들이, 플레이리스트의 노래 가사가, 항상 색다르게 느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굳이 어딜 떠나지 않아도 일상이 풍성해질 텐데. 그게 가능한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2주간 휴가를 냈다. 일상과 조금 다른 특별한 순간을 찾아 해외라도 다녀오면 좋겠지만, 무너진 일상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더 시급하다. 가장 먼저 HUG와 이사 날짜를 협의해야 한다. 지난한 과정 끝에 드디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전세 보증금 같은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 지난 4개월간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고 말았다. 찔끔찔끔 쌓여 심연 한구석에서 덩치를 불려 가던 스트레스의 침전물이, 나도 모르는 새 커다란 바위가 되어 있었다. 스트레스의 바위에 눌린 채 일상을 영위하니 늘 얹힌 느낌이 들었다.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일의 여파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데 너무나 큰 에너지가 들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보증금을 돌려받게 됐으니 해피엔딩인가.

     

 이번주에는 무려 4일이나 술자리가 있었다. 골치 아픈 문제가 사라진 만큼 오롯이 술자리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마음속 돌덩이는 아직 내 안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재미있게 신나게 놀고 싶은데. 뭘 해도 텐션이 잘 오르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는 알코올로 해결되지 않는구나. 맥주거품 같이 허황된 기쁨이 잠깐 차올랐다 금세 가라앉았다.

     

 그래서 굳이 성수기에 휴가를 냈다. 나는 합법적으로 무리에서 고립될 필요가 있다. 이대로 가다간 내 안의 악귀를 주변인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 같다. 경이로운 소문에 등장하는 2단계 악귀쯤 된 기분. 더 늦기 전에 악귀를 융으로 소환해야 한다. 무리에서 고립된 채, 오롯이 나 스스로의 힘으로 스트레스의 바위를 부숴내야 한다.

     

 그러니까 이번 휴가는 스스로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낸 셈이다. 조급해 하지 않고, 하나하나 천천히 바로 세울 생각이다. 망가진 몸도 돌보고. 새로 이사 갈 동네도 찾아보고. 가구도 좀 구경하고. 못 봤던 책도 실컷 보고. 매일매일 똑같은 일기도 민망해하지 않고 휘갈겨버리고. 그러다 보면 팍팍한 삶 때문에 얄팍해졌던 마음의 두께가 다시 두터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삘 받으면 시도 써보지 뭐.     


 악귀 소환의 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암욜맨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