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가 개를 흔드는 수사 中
'0' 을 증명할 수 있나?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
신이 없다는 것, 외계인이 없다는 것 이런 것은 증명이 불가능한 영역이다.(또는 매우 어렵다)
A 마을에서 한동안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 왜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는지 증명할 수 있을까? 없다.
A 마을에서 범죄가 발생했다. 이 경우 수사를 하게 되면 범죄의 발생 원인을 증명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과제가 주어졌다.
1. 우리 마을에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과제
2. 발생한 범죄의 원인을 밝히는 과제
어떤 과제가 쉬울까? 당연히 2번이 쉽다. 그리고 성과가 있다. 그게 수사다.
수사는 참으로 쉬운 과제이다. 반면에 범죄예방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며 그 성과를 측정하기도 곤란하여 남에게 인정받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 경찰행정기관은 수사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임무는 국민에게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 가능성인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위험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지식, 기술, 정책, 법이 필요하다.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며 경찰행정기관에서만 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정부차원의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어려운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범죄예방을 담당하는 부서에서의 성과를 측정하려면 범죄예방을 통해 예방된 범죄를 측정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가 발생하면 범죄예방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욕만 먹게 되는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수사는 범죄예방에 비하면 상당히 쉽다. 실패한 예방에 대한 대응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범죄예방을 위해서는 다양한 위험을 인식해야 하고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많은 대책이 필요하지만 수사에 필요한 법은 형사법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법적 지식이 있으면 된다. (난 고작 형사법에 대한 이해만 하면 되는 검사들이 법률전문가라고 평가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수사는 ‘실패한 예방’일 뿐이다.
범죄는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탈 중의 하나이며 범죄자에게 형벌을 과하는 것은 범죄를 다루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일반기업에서 발생하는 비위나 일탈도 마찬가지이다. 범죄, 일탈, 비위는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범죄를 예방하는 것은 비단 경찰만의 역할이 아니며 모든 정부기관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일반 기업에서도 내부감사 조직이 이러한 일탈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컴플라이언스 부서, 인사부서 및 각 사업본부에서도 각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평가하고 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일탈을 예방하는 것에 실패한 경우 국가는 수사를 진행하고 내부감사조직은 일탈에 대한 조사를 개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실패한 예방인 수사와 형집행만을 담당하는 검찰에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였고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조직은 예방보다는 수사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수사가 본질적으로 인권침해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고 자칫 한 사람의 생명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늘 신중하고 겸허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유독 거만하다. 경찰이나 검찰 모두 법집행기관으로서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법을 집행하는 행정기관일 뿐이다. 개인적인 프레임으로 선악을 구분하거나 사람의 유무죄를 심판할 자격도 능력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억에 왜곡이 있는 피해자와 목격자를 조사해야 하고 진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범죄혐의자의 거짓된 진술들에도 대응해야 하는 등 범죄재구성을 방해하는 요소는 많다. 여기에 수사관이 가진 오만, 편견, 편향, 욕심이 개입되면 왜곡은 심해진다. 이러한 왜곡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수사관에 의해 진행되는 수사는 매우 위험하다. 수사관은 법의 적용과 해석 능력뿐만 아니라 현행 법률의 위헌성도 상식에 의해 평가할 자질이 있어야 한다. 또한 수사라는 행위가 가지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수사관 자신도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편향을 가지고 있으며 억압받는 자는 허위자백을 할 수도 있다는 점, 수사관이 작성하는 조서는 대부분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인식해야 하는 등 법률뿐만 아니라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수사를 통해 1차적으로 국민의 억울함을 해소해 줄 수 있으며 범죄인의 검거를 통해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도 있으며 범죄인에 대한 재활의 기회를 주고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사회에 순응하도록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수사를 법집행 이상의 심판기능이라고 오해하게 되면 국민에 군림하고 범죄인을 함부로 평가, 심판하게 되며 이로써 사실관계를 위해선 사소한 불법도 용인하며 스스로의 영달을 위해 비겁한 방법으로 실적을 취하게 되기도 하며 심지어 정치권에 편승하게 되는 폐단까지 낳게 된다. 가장 무서운 것은 공직자는 쓰임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국민을 이용할 수 있는 권력계층이라는 기이한 가치관이 부지불식간에 형성된다는 것이며 특정 수사기관의 남용 사례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관찰되어 왔다.
법에 의한 주어진 권한이 없으면 수사관 개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수사관이 가지고 있는 권한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될 수 있을 뿐이다. 수사관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은 자신감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국민에 대한 두려움, 법에 대한 두려움,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