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탕 강의, 온탕 강의

by 버팀목

어제는 오래간만에 바빴다.


오후에는 현직 수사팀장들 상대로 디지털증거법 강의 4시간, 저녁에는 대학원 강의 3시간


물론 4시간짜리 강의는 2시간, 3시간짜리 강의는 1시간 반만 했다. 난 게으르니까


수사팀장들은 늘 그렇듯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다.


항상 이런 교육생들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최대한 기대어 앉아서 개구리가 적을 만났을 때 배를 부풀리는 행동을 한다. 배운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네가 뭘 알아? 어디 얼마나 강의를 잘하는지 보자"라는 태도이다.


상사를 만났을 때는 늘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강의를 들을 때는 왜 항상 이런 태도를 취하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2003년부터 형사들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으니 20년간 이러한 태도와 마주해 왔다.


이러한 교육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려면 팔짱을 풀고 의자가 부러지도록 젖혀 앉은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해 20분 정도의 아까운 시간을 써야 한다.


수사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한결같이 똑같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보아 왔으니 사람을 잘 알고 세상을 잘 안다는 자만감이 충만하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낮아 보이는 사람, 어린 사람 등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반면에 팀장, 과장, 서장, 국장, 차장, 청장에게는 하늘을 모시는 땅처럼 행동한다.


난, 정말 이런 게 싫다. 너무 싫다.


결국 디지털증거법의 'ㄷ'자도 제대로 꺼내 보지 못하고 '나쁜 눈'을 '착한 눈'으로 바꾸기 위해 시간을 써 버렸다.


"수사가 무엇인가요?"


"수사를 왜 하나요?"


"미국 Innocent Project 실험을 통해서 300명 이상이 무죄 방면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요?"


"우리가 쫒는 것이 진실인가요? 진술인가요?"


"인터뷰는 묻는 것인가요? 듣는 것인가요?"


"형사소송법의 주어는 경찰인가요? 법원인가요?"


"오원춘으로부터 280조각으로 분해된 20대 피해자로부터 살려달라는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수사로 예방을 할 수 있나요?"


"국가보안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1년에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인 줄 아나요?"


"미행과 잠복은 합법인가요? 불법인가요?"


"여러분이 수사를 하는데 필요한 법률은 무엇이 있나요?"


"1925년 일본에서 만든 치안유지법의 피해자 75,000명이 아직도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아는가요?"


"안보, 정보, 수사가 경찰의 임무인가요?"


"작년 10월 29일 159명이 죽었는데 그 피해자 중 대통령의 아들이나 딸이 있었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왜 달라야 할까요?"


"팀장의 역할은 무엇이죠?"


"두렵지 않나요?"


..............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하는 교육생이 없으니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고 시간은 흘렀고 결국 "0"의 발견, Digit "0"과 "1"에 대한 설명만을 하고 수업을 끝냈다.


이들이 나를 초빙한 것은 '어떻게 하면 디지털 증거 압수수색을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다.


그런데 나는 당초 압수수색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문제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답을 알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저녁 7시


냉탕에서 온탕으로 옮겨 갈 시간이 되었다.


대학원생들, 종일 수업 듣고 연구실에서 잡일까지 하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눈은 늘 초롱초롱하다.


교수가 있든 없든 그들은 늘 허리를 꽃꽂이 세우고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교수가 들어가면 미어캣들처럼 몸까지 틀면서 교수를 쳐다본다.


"오늘은 케냐 콩밭 이야기랑, 22살에 분신자살한 전태일 이야기를 해 줄게요. 그리고 학우 두 명 발표를 들어 봅시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늘 즐겁다. 강의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즐긴다는 쪽이 가깝다.


이들은 동료 학우들의 어설픈 발표에도 항상 귀를 기울이고 궁금한 점을 모조리 질문해 댄다.


이들도 졸업한 이후에는 직업을 가질 것이고 필요하면 결혼도 할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지치고 물들겠지만


나같이 찌든 인간이 되거나 반백살의 나이에 무지함을 깨닫게 되거나 좌빨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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