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출근합니다.
출산휴가 후 첫 출근 날. 친정어머니 품 안에 안겨있는 딸아이를 두고 도저히 발이 떼지지 않았다. ‘발이 땅에 붙은 것 같이’라는 관용적 표현은 얼마나 현실적인 묘사인가.
내가 없는 동안 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 아이를 눈앞에 두고 돌아설 수 없었다.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야했다. 엄마가 처음인 우리에게 스스로를 믿으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도저히 확신이 들지 않으니까. 스스로가 아니라 하늘을 믿어야 가능했다. 딸이 일찍이가 되어 우리에게 온 것도 계획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보내주셨던 것처럼 지켜주실 것이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친정어머님께 맡겨 두고서야(어머니가 고생 많으셨다. 손주는 키워주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었는데. 막상 이도 저도 못하고 이리저리 치이는 딸과 그 딸의 딸을 보신 날, 차마 떠나지 못하시고 연고도 없는 곳에 짐을 푸셨다. 아이를 돌봐주실 수 있는 건강한 어머니가 계신 나는 사실 다른 많은 분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것이다. 다들 어떻게 이 험난한 시기를 보내고 계시는지. 이 시기 우리는 모두 각자의 전쟁터에서 처절한 전투 중이다. 큰 전흔없이마무리되길 기원합니다.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그 끝이.)
땅에 붙었던 발이 쩍하고 떨어졌다.
주체적인 삶(남편을 따라다니지 않는-분리된 삶)을 꿈꾸다 좌절되어 애기엄마로 다시 출근한 세무서 생활은 행복했다.
컨테이너 박스여서 더 좋았다. 우리들만의 공간이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웃고 울고 살았다. 다 같이 지냈다.
간절히 원하던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이 주어진 곳이었다.
생각해보면 실수로 잘못 들어선 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일어났어야 하는 일들을 맞이한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다. 실은 스스로도 모르게(또는 무의식적으로) 더 잘 계획된,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히려 꼭 실패했어야 하는ㅡ 꼭 잘못 들어섰어야 하는 길이었다. 대부분 그 여정을 마친 뒤에야 알게 되지만.
울산 컨테이너 박스의 형제들이 내게 그랬다.
시작할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삶이 더 흥미진진하겠지. 이번 선물은 대체 뭐길래 이렇게 힘든건지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