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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Mar 23. 2019

그네

밤이 되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밤이 되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종종 사람들이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지나갔다. 놀란 표정을 지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나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마주 보고 미소라도 지었다면 얼마나 더 놀란 표정을 보여줬을까. 듬성듬성한 가로등 빛과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 빛에 의존해야 하는 깊은 밤의 풍경은 언제나 섬뜩함을 조금씩 품고 있으니까. 달빛 아래를 걷고 있는 낯선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뜬금없이 미소를 짓는 상상을 했다. 팔뚝에 스르륵 소름이 돋았다. 아니, 몸을 스쳐가는 차가운 바람에 아까부터 소름 비슷한 존재가 온몸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괜히 한번 옷을 툭툭 털었다. 양쪽으로 그네를 잡고 있던 두 손이 빨갛고 차가웠다. 외투의 소매를 더 잡아 내렸다. 손등이 조금 덮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내 손가락은 여전히 찬 바람을 맞고 있다. 손이 시리다.



'나 추워.'

'집 아니야?'

'그네 타고 있지.'

'놀이터에서?'

'응, 이제부터 맨날 그네 타려고. 딱 이 시간에.'



이어폰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을 건넬 때마다 빠르게 돌아오는 너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이 시간에 그네를 타기 시작한 이유는 너와 전화하고 싶어서였다. 집에서 통화를 하면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 너는 뭐 했고 나는 뭐 했는지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말해줘도 금방 잊어버릴 그런 얘기를 나눴는데, 그래도 가족은 몰랐으면 했다. TV에서 얘기해 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는 어느 시골 마을 이야기처럼. 애써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갔다. 운동 좀 하고 온다고 말했다. 꽤 괜찮은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퍽 서툴게 들리는 핑계였다. 이 밤에 갑자기 운동이라니. 그것도 월요일은 10분, 화요일은 1시간이 넘기도 하는 운동이라니 말이다. 그래도 아무 말 안 해준 가족에게 고마웠다. 아니 쓸쓸하고 외로워해야 하는 걸까. 언젠가 가족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어쩌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정말로 쓸쓸하고 외로워질 질 것 같다.


밤에 밖에 나와서 좋은 점도 있다. 여름이면 덥고 습한 집보다 밖에서 그네를 타는 게 더 상쾌할 때가 많았으니까. 대신 8월이 되면 방학을 맞은 어린 친구들에게 자리를 내어 줘야 했다. 여름에 집이 덥고 습해지는 건 다들 비슷하니까. 덕분에 슬렁슬렁 주변을 맴돌며 자리가 나길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그네를 타는 다 큰 어른이 되었다. 많으면 4개 적으면 1개나 2개뿐이었던 놀이터의 그네는 내가 어렸을 때도 인기가 많았다. 친구 여러 명과 놀이터에 놀러 가면 갑자기 서로 경쟁자가 되어버려 어리둥절했다. 처음엔 그네 앞에 서서 눈알만 떼굴떼굴 굴렸고, 나중엔 친구가 먼저 타버린 그네와 최대한 멀어지려고 애썼다. 미끄럼틀을 제일 좋아한다고 외치며 머리가 핑핑 돌 때까지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빨리 달리고 목소리 큰 사람이 제일 먼저 타는 그네. 겨우겨우 마지막에 타게 된 친구들은 대부분 얼마 타지 못하고 내려야 했을 거다. 앞서서 타고 간 친구들이 이제 그네에는 흥미를 잃어버려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을 테니까. 마지막에 탄 친구에게는 지금 그네가 세상에서 가장 재밌을지라도 빠르게 선택해야 했다. 따라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쓱.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겨울밤, 혼자 타는 그네가 문득 씁쓸했다.


그래서 나는 졸업하고 새로운 학교에 갈 때마다 딱 한 명의 친구랑만 놀았다. 항상 동시에 그네를 탈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 그러다 대학교에 왔고 너를 만났다. 우린 함께 가족이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너의 가족들 이야기를 몰래 나눴다. 가끔은 내 가족 이야기도 했다. 지금 타고 있는 이 그네에 앉아서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얘기했는데. 그 날들에 우리는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나눴던 걸까. 이어폰으로 주고받던 그 대화들이 점점 아득해졌다. 가만히 한 곳을 바라봤다. 너와 전화할 때마다 자주 봤던 놀이터 앞 소나무. 밤에도 초록색으로 보여 신기하다고 말했던 그 나무의 잎은 오늘도 선명했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최애는 따로 있었다. 우리가 평소에 가고 싶어 했던 장소에서 만나, 서로의 얼굴을 보고 온몸을 움직여가며 나누는 대화다. 서로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순간에 집중했다. 이어폰 없이 들려오는 너의 진짜 목소리를 하염없이 들었고 너에게 내 목소리를 더 가까이 들려주었다.


아, 딱 작년 오늘처럼 춥다. 코 끝과 귀 끝이 따가울 만큼 무섭게 춥다. 집에 가야 하는데. 그네에 엉덩이가 아주 무겁게 붙어버렸다. 두 다리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오늘은 너와 전화할 수 없게 된 첫 번째 날이다. 양쪽 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제일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그 노래가 들린다. 궁금하다. 너는 이제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 아무리 애써도 알지 못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자꾸만 반복되는 날씨처럼, 우리도 자꾸만 다시 만날 줄 알았다. 어느 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떤 시골 할머니가 되어 TV에라도 네가 나오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목소리를 듣고 싶다. 맥락 같은 건 다 필요 없으니 아무 때나 우리 이야기를 꺼내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우린 매일 밤 함께 그네를 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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