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우석 Mar 28. 2020

재미력의 노쇠화

재미있는 사람의 비애에 관하여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고 쳤을 때,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와 스킬셋이 좋은 선수 중 누가 더 롱런할까. 이 논의에 대한 직관적인 대답은 스킬셋이 좋은 선수다. 스킬셋이 좋으니 나이가 들어 신체능력이 떨어져도 그 기술로 극복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가 더 롱런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기술이든 구현할 수 있는 신체능력이 있어야 빛이 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빅맨의 커리어가 가드의 커리어보다 긴 경우가 많고, 우리는 43살의 빈스 카터를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스킬셋은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거의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고, 몸무게가 73킬로였던 시절을 지나 62킬로를 거쳐 65~66쯤에 자리를 잡으면서, 근력 운동을 통해 과거의 신체능력을 어느 정도 찾고 나서야(허리는 돌아올 수 없다) 농구가 다시 잘되기 시작했다. 나의 슈팅 능력이나 왼손 레이업을 잘 못 올라가는 거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잘 뛸 땐 그런 거 없이도 씹어먹었던걸 생각하면 스킬셋의 부족을 한탄했던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물론 운동능력의 노쇠화는 필연적이다. 어떤 능력이야 그렇지 않겠냐만 운동능력의 감퇴는 절대적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아직도 NBA 최상급의 운동능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가 덩크 콘테스트에 나오지 않는 점을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기본적인 티어가 높았던 까닭에 내려와도 위쪽에 존재하는 것뿐이다.




내 기억이 존재하는 한, 그 기억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재미있는 사람의 타이틀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나보다 재밌는 사람도 있겠지 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져도 봤지만 결국 서른 살 되는 생일에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내 생일 선물로 줬다. 그때까지 못 찾았으니, 나는 절대적으로 재밌는 놈이라는 게 증명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력은 마치 운동능력과 같다. 생일선물로 줬던 그 타이틀은 어느 시점에서는 다시 빼앗아야 하거나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30대 후반 중 재미있는 사람' 이런 식으로 조건이 붙어야 하거나 상대적인 가치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절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변화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은 뭔가 '광대의 비애'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광대의 비애란 약간 중이병 있는 인싸가 나에게도 아픔이 있다는 점을 알리고자 차용하는 개념이며, 그 어필 조차 또 하나의 관종적 메커니즘의 발로로서 본인의 인싸력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하곤 한다. 결국 전략적인 아픔의 표출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재미력의 노쇠화는 왜 올까. 내 재미력의 노쇠화는 분명히 왔다. 그런데 신체능력처럼 자연스럽게 나이가 먹으니 감퇴되는 것으로 인정하고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다. 이건 언제고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아야만 인정할 수 있는 성격이라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에 이르렀다. 약 세 가지 정도를 들어본다.



1. 재미없는 사람들과의 더 많은 조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믿는 명제이고, 이건 재미의 측면에서는 더 확실하다. 요컨대 재미없는 사람 1명과 재미있는 사람 여러 명이 같이 지내면 그냥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 재미없어진다. 그걸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곳(사람)을 피해 다녔다.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람과 집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나는 재미없는 사람들에게 오염될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완만하지만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


2. 재미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필드의 희소성


학창 시절에는 어쨌든 아침에 해가 뜨면 지각을 하던 조퇴를 하던, 결석만 하지 않으면 꼭 가야만 하는 학급이 있었다. 대학에서는 보다 그 모임의 자유도가 높아지긴 하지만 어쨌든 어딘가 소속되어야만 하고, 꽤 많은 시간을 동일한 구성의 사람들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집단 내에서는 개인의 재미력이 어느 정도 발휘되게 마련이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그런 필드가 희소하다. 만들 수도 만들어진 곳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분명히 예전 같은 환경에 놓이기는 어렵다. 쓰지 않는 칼날을 계속 갈고닦을 장인은 적다. 게다가 재미력이란 누군가의 리액션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수비가 없을 때 쏘는 슛 성공률의 의미가 적은 것과 비슷하다.


3. 라이벌의 부재


어렸을 때는 항상 라이벌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오 너랑 걔랑 같이 있는 자리를 꼭 마련해야겠어!", "와 내가 아는 아무개가 있는데 솔직히 둘이 같이 있으면 치열할 듯."과 같은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경쟁심을 느꼈다. 경쟁적인 타입과는 거리가 멀지만 또 져선 안 되는 분야라는 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기에, 그 긴장감 속에 그 아무개와의 합석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언제나 맛보지만,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는다. 누가 더 재미있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크리티컬한 이슈가 아닌 것이 되었다. 재미있는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으면 그만인 상황이 되어, 재미력으로 먹고살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채찍질할 동기가 없는 거다. 어차피 재미없던 사람이 갑자기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 경우는 그 사람이 재미있었음에도 본인을 숨기고 살아왔던 케이스 외에는 없기에, 새로운 라이벌이 생기지 않는 시점이 오면, 그 노쇠화도 급격히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너는 좋겠다고 너는 내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조차도 재밌자고 한 말이었지만 진심은 당연히 담겨있었다. 이제는 이런 말을 해도 사람들이 웃을 거라고 생각하니 뭔가 서글픈 느낌이 든다. 꽤 괜찮은 요리를 내놓았기에 칭찬은 받겠지만, 그 요리는 원래 내가 만들던 것에 비하면 전투 식량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셰프의 느낌이 이럴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노쇠화는 돌이켜 그 방향을 바꿀 수 없기에 더 슬픈 것 같다. 르브론 제임스의 덩크 높이가 점점 내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전 06화 스트레스의 효용 가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