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와의 만남
사주를 처음 본 건 본사를 향하던 차 안이었다. 새 물건 자료를 구하기 위해 본사엘 가야했는데 때마침 우리지사를 방문한 회장의 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지사별 경영체재라 서로에게 사전 지식이 없는 애매한 입장이었다. 차 안 오디오에서 희미하게 70년대 팝송이 흘러 나왔다. 동시대를 살아 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익숙한 멜로디였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첫대면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대부분 영업분야에는 젊은 오너와 임원들이 대부분인데 거의 동년배인데다가 40년 경력의 베테랑이라니 안심해도 좋을 거 같았다. 지사장이었던 이이사가 간단히 신입 부장인 나를 소개 했고 룸미러 너머로 인사가 이루어졌다.
작지만 첫계약을 무사히 마쳤지만 평온한 날은 얼마가지 않았다. 지사별 통폐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 7~8 개의 계열사가 4군데로 축소 되었고 임원들과 조직간의 갈등이 시작 되었다. 지사를 폐업하고 사무실 보증금을 빼내간 임원도 있었고 조직원을 선동하여 물건을 압류하는 소동도 있었다.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이이사와 우리 지사는 비교적 무풍지대라고는 하지만 임원이 바뀌고 부서가 축소되는 어수선한 분위기는 감수해야만 했다. 영업실적은 저조할 수 밖에 없었다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는데 50억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새부서가 온다는 소문으로 영업장의 분위기는 후끈했다. 그만큼의 재정이라면 통폐합에 따른 손실쯤은 단숨에 메꿔질 수 있을 거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직원들은 일을 하려는 의욕보다는 안주하려는 마음이 커졌다. 통폐합에 따른 본의 아닌 손실을 경험한 후라
너도 나도 몸을 사리는 분위기도 있었다.
유약한 이 이사와 꾀 많은 신 전무의 조합은 처음부터 삐거덕 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사는 신 전무를 제치고 나와 영업을 의논하기 시작했고 신 전무는 재빨리 50억 매출을 예상하는 강 전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회사는 두 파로 갈리게 되었다.우리는 어떻게든 우리 힘으로 영업 손실을 메워 보려 노력했고 신 전무와 강 부장은 50억을 기다리자는 안이한 방법을 택했다. 통폐합 과정에 우리 회사에 합류한 정 부장은 강 부장과 언니 동생 하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사주와도 오랜 친분이 있었다
통폐합에 따르는 정신적 고초와 계속되는 영업부진을 겪고 있는 사주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나보다. 50억 매출이 이런저런 사유를 대며 늦어지자 앓아 눕고 말았다. 간호를 해줄 수 있는 가족들도 없는 상태라한다
정부장은 살갑게 사주를 돌보았다. 병원에서는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집에서도 거의 살림을 돌보며 혼자사는 사주의 뒷바라지를 해대었다 적자가 누적되는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 사주의 뜻하지 않은 부재에 혼란을 겪고 있던 우리에게 정부장은 구세주 같았다. 정부장은 사주의 사저와 업장을 오가며 회사내에서는 오너 같이 사주의 사저에서는 부인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사주의 통장은 텅 비어 있었다. 회사의 통장에도 남아 있는 자금이 없었다. 처음 사비를 털던 정부장은 현실을 알아채고 우리들을 협박 했다. 회장을 살리고 싶으면 우리에게 경비를 부담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간병비까지 터무니 없는 경비를 제시하기도 했다. 재고처리도 회장의 결재가 있어야하는데 누어있는 회장에게 결재를 맡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때 그때 회장의 컨디션에 따라 결재가 늦어져 판매 기회를 놓치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회장이 회복 될때까지 최종 결재 권한을 양도 받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시급한 자금을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회장은 우리가 준비한 서류를 훝어 보았고 사태를 파악한 것 같았다. 마지막 사인을 하려는 순간 조금만 생각해 보자며 정부장이 회장을 만류했다
정부장은 임원들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회장을 보필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재고 판매 권한을 임원들이 아닌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갖 루머를 만들어 내어 회장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노회한 회장이지만 정 부장의 감언이설과 자신을 정성껏 보살피는 정 부장을 외면할 수는 없었나 보다. 치일 피일 결재가 늦어지고 우리는 자금 마련을 위한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회사의 경영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급여는 물론 모든 공과금이 밀리고 사무실 월세도 밀려 보증금을 갉아먹고 있었다. 영업조직도 거의 붕괴되어 이권이 걸려 있는 몇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 회장은 정 부장의 눈을 피해 이 이사와 나를 불렀다 정 부장의 감언이설은 믿지 않지만 회장의 병실을 드나드는 직원들이 모두 이 이사를 음해하고 있다고 털어놓으며 이 이사를 믿으니 힘들더라도 남은 직원들을 결속시켜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해왔다. 꿋꿋이 이 이사를 돕고 있는 나에 대한 신뢰를 보이기도 했다. 이 이사는 동료들의 배신에 치를 떨었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회장의 지시로 우리는 사무실의 보증금을 빼어 작은 사무실로의 이전을 준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