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일기는 쓰지 못하더라도

by 우선열

한 아기의 육아 일기를 쓰는 일은 누구나 처음이다. 세상에 똑같은 아기는 없으니 같은 육아 일기도 있을 리 없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들도 자라는 과정과 성격이 다르게 마련이니 육아일기도 다르게 쓰여야 한다. 육아 일기를 쓰는 것은 누구나 초보일 수밖에 없다.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 손주 자랑은 돈 내고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더니 손주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손주를 본 친구들과 손주를 보지 못한 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손주를 본 사람들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모든 대화는 손주에게로 귀결된다. 자식은 둘, 셋인데 손주가 한 명도 없는 친구도 많다. 아이 한 명을 어른 7~8명이 돌본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친가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에 고모, 이모, 삼촌들까지 아이 한 명에 울고 웃는다. 그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라면 돈 내고 손주 자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딸이 셋인 우리 언니도 손주는 단 한 명이니 겨우 늦둥이 아들 하나를 둔 내게 손주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 같다. '아들 육아 일기는 쓰지 못했으니 손주 육아 일기는 써봐야지' 속으로 다부지게 마음먹었건만 육아 일기의 길은 멀기만 하다. 이젠 막상 손주가 생겨도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까 걱정이다. 특별히 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노화 현상을 겪고 있다. 눈도 침침해지고 발걸음도 늦고 무거운 걸 들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도 있다. 제 대로 손주 한번 안아줄 수 있을까 미리 걱정이다.

"걱정은 ···쓸데없어, 요즘 누가 친할머니에게 육아를 맡기니, 거의 외할머니 차지야, 거기다 애 본 공은 없다잖아, 아무리 정성 들여 돌보아도 애가 아프면 돌보는 이 탓이라니까. 애들 예쁜 건 잠시, 손주 돌보는 건 힘들어, 오죽하면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있겠니, 휴대폰으로 전송되는 아이 사진을 보고 울고 웃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거야, 손주 돌볼 생각 말고 고 네 몸 먼저 돌봐"

친구의 일침이다. 나름 건강관리를 하고 있지만 건강은 자신할 게 아니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최근에 한 문우는 건강검진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그대로 입원했다. 벌써 삼 개월째 각종 검사에 시달리고 있지만 면역력 부족으로 인한 병이라는 것뿐 병명도 치료 방법도 아직 알려진 게 없다고 한다. 멀쩡히 걸어서 들어간 병원에서 누운 채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친구의 푸념이다. 그래도 불치병은 아니라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니 다행이다. 말 한마디 못하고 쓰러져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노인의 건강은 자신할 게 아니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부음에 우울증을 호소하는 친구들을 종종 보게 된다. 관리를 잘하고 있는 경우에도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게 사람의 일이다. 또래 중에서 가장 건강한 문우 한 사람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열리는 차 문에 팔을 부딪쳐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 살짝 금이 간 상태라 삼 개월 정도 깁스를 해야 하지만 비교적 빠르게 아물고 있는 편이라 한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해둔 덕이다. 전에는 이런 일들이 남의 일 같았는데 나이 드니 남의 일이라고 할 수 만도 없는 것 같다. 내게도 곧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육아 일기 대신 병상일기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던 젊은 시절에는 육아일기를 쓰려는 엄두도 못 냈다. 젊은 시절에는 사느라 바빴고 처음이라 모든 게 미숙했다고 변명해 보지만 지금도 역시 늙는 건 처음이다. 어떻게 늙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신체의 노화를 받아들이는 일도 난감하기만 하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나는 늦게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자식의 육아 일기는 쓰지 못했지만 손주의 육아일기는 써보고 싶다. 할 수 있을 때 하지 못하고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 것 같지만 늦게라고 발견한 글쓰기의 즐거움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병상일기든 육아 일기든 기록을 남기는 일은 나 자신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일도 되지만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쌍둥이도 각자 개성이 다르지만 같이 겪어야 하는 성장 과정은 있듯이 나의 기록이 누군가 에게 공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이 시간이 소중 하다. 육아 일기를 쓸 기회가 왔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늙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지금도 나쁘지 않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