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날아, 잘 가거라

by 우선열

아직은 봄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수련과 찔레꽃은 볼 수 있겠다

모처럼 탄천 나들이에 나섰다

수련이 피기 시작한 걸 보고 만개하면 다시 오리라 다짐했건만 무심한 날들은 혼자 바쁘다.

길 끝에 나를 세워 놓고 혼자 가버린 듯하다

철 모르는 유채꽃만 철없이 노랗다

길가 미루나무 잎이 햇볕에 반짝이며 나를 위로한다

작은 미루나무 잎은 살짝 지나가는 바람에도 환호한다

첫아기가 주먹을 쥐락펴락하던 때의 환희를 닮았다

세월을 탓해 무엇하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 축복인 것을


뽕나무 가지가 휠 듯 오디가 열렸다

붉은색은 벌써 검게 익어가고 검은 오디는 제 무게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길바닥이 더불어 까맣다

떨어져 누운 꽃잎은 사뿐히 지르밟을 일이라지만

오디 열매의 검은 자국에 보는 이의 심사가 편하지 만은 않다

까치밥으로 겨울을 나는 감도 있건만 마저 익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는 오디의 자발없음 때문이다

어찌 오디 탓 만이랴

열매를 탐한 사람들의 거친 손길도 있었으리라

살랑바람에 흔들리고 싶었을 오디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안온한 마지막을 그렸겠지만 욕심 사나운 사람들의 손길에 시달려야 했다

오디 탓을 해 무엇하랴만은 사람의 부질없음도 탓하지 않으련다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는 까닭이다


꽃이 진 자리에 보리가 익었다

보기 좋은 황금색, 풍요의 상징이다

어린싹으로 견뎌낸 모진 세월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일,

모든 일은 지나간다

화무십일홍, 예쁜 꽃도 열흘을 버티지 못하고 추운 겨울이 지나야 비로소 봄을 맞는다


한 번 더 수련을 보고 싶었다

봄날의 아름다움을 조금 더 누리고 싶었건만 무심한 세월은 혼자 바쁘다.

내일을 기약하는 대신 황금빛 보리에 안도한다.

세월이 저 혼자 가버린다 탓하지 않겠다.

지금 내 곁에는 노랗게 핀 유채꽃과 황금물결 출렁이는 보리밭이 있다

봄날 아, 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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