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구찌 베니를 바르고 뾰족구두를 신는 일이었다.
틈만 나면 우리는 어머니 화장품을 몰래 바르고 구두를 훔쳐 신고 놀았다.
엄마 화장품을 바른 날은 소꿉놀이가 더 신이 났다.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엔 어른이 된다는 건 화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막상 화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화장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
즐겁게 하는 일이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삶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기쁨이기도 했다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얻는 기쁨들이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오는 좌절과 실망도 견뎌야 했다
유독 내게만 닥쳐오는 것 같은 삶의 고비들이 힘겹기도 하고 내 몫이라는 체념이 생기기도 했다
한두 번 남의 몫과 비교하며 비탄에 젖기도 했으나 오래갈 수는 없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때문이다.
감상에 젖어 그때그때 감당하지 못하면 그대로 휩쓸려 가고 말 것만 같았다
이 한 몸이야 이리저리 흔들리고 떠내려 가고도 싶었지만 내가 짊어진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힘겨웠으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기도 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내가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 나를 이끌어 온 것도 같다.
그렇게 소망하던 어른의 정체는 그러했다.
지금은 소꿉놀이를 하던 시절에 동경하던 화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어머니는 70 무렵, 내게 말씀하셨다
"이젠 화장하지 않아야겠다, 늙은이가 화장하는 모습이 초라해 보여서 말이야"
그 무렵 어머니는 요실금이 시작되었다
마트에 갈 때 검은 비닐을 챙겨 성인용 기저귀를 남이 안 보이게 감싸셨다
"엄마 그게 뭐가 부끄러워, 열심히 사신 훈장이에요, 자랑스러워야지" 했지만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의 노화가 안타까웠다기보다 기대고 있던 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여야 했다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셔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무렵부터 어머니는 색조 화장품을 쓰지 않으셨지만 로션 같은 기초화장품은 꾸준히 사용하셨다
고급 화장품을 쓰시는 어머니는 나를 위해 샘플을 챙겨 두셨다
오 남매 중 아픈 손가락이 되어 버린 내가 안타까웠으나 자식들에게 받는 용돈으로 사 쓰시는 화장품을 딸에게 줄 수 없는 어머니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되었다
화장을 동경하던 시절이 지나고 화장을 해야만 하는 현실을 감당해 내었다
감사한 일이다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시간이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치열한 삶을 다시 되풀이할 자신이 없다
다행히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회한과 미련을 내려놓는 일이 힘들기는 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니 화장을 해서라도 감추고 싶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 내려놓는다. 타의 반은 변명일 수도 있다.
내 부족함을 타인에게로 전가시키려는 얄팍한 술수 같았다
그래서 내려놓기로 했다
결과는 부끄럽지만 최선의 노력이어 었다는 변명으로 위로한다
어쨌거나 이제는 민 낯이다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되고 어른 흉내를 내고 싶지도 않다
치열한 젊은 날에 내게 위안을 주던 온화한 할머니 모습이고 싶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화장하지 않은 내 모습이다
이젠 색조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초화장품으로 본연의 모습을 들어 내 보여야 한다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모습,
자식의 독립을 안정하고
내가 꿈꾸던 온화한 할머니의 모습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인생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