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의 시대라 한다.
개나 고양이를 가족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 내 서열도 1, 2위를 다툴 정도다.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말과 행동이 사람과 다르니, 이들을 기르려면 아기처럼 보살펴야 한다.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히기도 한다.
사람은 자라며 제 역할을 해내지만, 이들은 생의 끝까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키우며 받는 위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반려동물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내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르는 사람들 중에는 반려동물에게도 의료보험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관련 제도가 추진 중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이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이어진다.
국민의 세금이 호불호가 갈리는 분야에 쓰인다면 첨예한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게다가 여전히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도 많은 현실을 고려하면,
더 깊은 고민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울 생각이 없다. 아니, 솔직히 키울 자신이 없다.
말 못 하는 생명의 마음을 헤아리며 먹이고 보살피는 일이 내겐 버겁게 느껴진다.
자식이 독립하고 나 홀로 지내지만 여전히 일상은 바쁘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시간을 쪼개어 돌봐야 하고, 경제적 부담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돌봄을 소홀히 하게 될까 걱정스럽다.
‘반려동물 시대에 부모님은 5순위’라는 말을 들으면 이런 내 생각이 괜한 기우만은 아닌 듯하다.
나는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보다 다른 무언가를 우선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먼저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시간이 남아 여유가 된다면 그때 가서 반려동물을 들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도리를 다하지 못한 채 오롯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반려동물을 키운다면, 그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 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부모보다 반려동물을 먼저 생각하는 풍조에 익숙해졌다.
‘부모는 5순위’라는 말이 상징하듯 말이다.
하지만 사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나조차 부모님께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
정이란 정해진 양을 나눠 쓰는 것이 아니라, 베풀수록 더 커지는 것이라면,
부모에게 드리는 마음과 반려동물을 향한 정성은 단순히 비교할 수 없는 별개의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굳이 부모를 5순위라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지만, 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돌봄의 여력이 충분하고, 그만큼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다.
공공장소에서의 에티켓을 무시하거나, 반려동물을 타인보다 우선시하는 태도는 함께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만든다.
대부분 고양이는 집 안에서 기르기에 그런 문제는 적은 것 같다.
만약 내가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아마 고양이를 선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 참 요지경이다.
이제는 개와 고양이가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젠 반려동물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존재는 개나 고양이처럼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존재다.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머지않아 반려 로봇이 정서적 교감은 물론 실제적인 도움까지 주는 시대로 접어들 것 같다.
어쩌면 반려 로봇과 사랑에 빠지는 날도 올 수 있다.
이미 애완 로봇은 존재하며, 반려 로봇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건 더 이상 공상과학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인간이 인공지능의 도움을 넘어 지배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평생 돌봐야 하는 반려동물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들이 예견된다.
그래서일수록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시급하다.
어쨌거나 반려 로봇은 보살펴야 하는 존재라기보다, 보살핌을 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
현재의 속도라면 5년 안에 반려 로봇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도 반려 로봇의 도움을 받을 세대가 되는 걸까.
반려동물은 끝내 키우지 못했지만, 반려 로봇은 한 번 들여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