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은 혹독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혹독함이 끝났다는 것이니까요.
예년 같으면 지금쯤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어'지난여름은 위대했습니다'라며
가버린 여름을 아쉬워하고 있으련만
태풍마저 막아선 올여름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물러설 줄 모르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 더위입니다
당분간은 여전히 열대야와 30도를 웃도는 최고기온을 감당해야 할 듯합니다
행복한 여름이 아니라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여름입니다.
그래도 가을은 온다'라고 위로하는 수밖에요
올해는 윤 유월이 들어 추석도 10월이 되어야 합니다
눌러앉은 여름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그래도 9월이 되면 조금은 더위가 꺾이겠지'
풀 죽은 하소연을 해 봅니다.
모처럼 찾은 휴가지에서도 시원한 자연 바람보다 냉랭한 에어컨 바람을 찾아야 하는
호된 여름을 아직은 얼마간 더 견뎌내야 합니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라 합니다
다시 올 수 없는 날들이니 아쉽기는 합니다
더위에 지친 초록들, 햇볕아래 더 아름다운 배롱나무꽃의 진홍빛,
더 이상 시원하지 않았던 바다와 강물, 땀을 식혀주지 못했던 산과 계곡의 바람.
2025년 여름은 이렇게 기억되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런 더위를 감당하며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못다 한 미련이 있어 아쉬움도 커지는 걸까요
남은 더위가 꼭 성가시지만은 않습니다
더위를 피하느라 소홀했던 여름 일들이 아쉬워집니다
가을이 오기 전에 한 번은 더운 여름을 즐겨 보고도 싶습니다
이번 여름, 가장 아쉬웠던 일은 호야 꽃이었습니다
여름동안 에어컨을 켜느라 베란다를 향한 문을 굳게 닫아 버렸습니다
잠시 환기를 위해 열어 놓기도 했지만
하필 작은 호야는 커다란 산세베리아에 가려 볼 수가 없었던 거지요
봄에 돋은 산세베레아 잎이 무럭무럭 크고 있었거든요
연약한 연둣빛 새싹이 진초록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느라 키 작은 호야를 산세베리아 뒤에 놓아둔 것입니다
호야는 저 혼자 꽃이 피고 있었습니다
휴가를 떠나느라 며칠 집을 비운 참이기도 했습니다
호야 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절정을 지나 후두득 꽃잎을 떨구고 있었습니다
꽃을 발견한 경이의 순간에 지는 꽃의 허망한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속수무책, 망연자실 꽃이 지는 모습만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초라한 내 베란다 화분에서 꽃이 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산세베리아와 호야, 금전수 세 송이, 모두 선인장과의 꽃이 잘 피지 않는 식물들이거든요
팔 년을 침묵하던 호야 꽃이었습니다
가끔은 호야 잎이 분홍색이나 노랗게 물이 들기에 호야는 그렇게 잎이 예쁜 식물인 줄만 알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서툰 내 손길에서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으니까요
다행히 호야 꽃 두어 송이가 다시 봉오리를 맺고 있습니다
한 번 꽃을 피운 호야는 연달아 몇 번 꽃을 피운다는군요
호야 꽃이 지고 난 후 사후 약방문 격으로 알아낸 호야꽃의 습성입니다
그 후론 애지중지 아침마다 베란다 문을 열며 호야꽃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나는 호야꽃 두 송이를 더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피었다 진 호야 꽃이 애처롭긴 하지만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한 호야 꽃이 한없이 고맙습니다
혹독한 더위에 보살펴 주는 이 없는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낸 겁니다
한번 왔다가는 인생, 중요한 건 자신에게 충실한 삶입니다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 그것이 삶입니다
첫 번째 호야 꽃은 보아주는 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다시 꽃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한 번 핀 꽃은 수다히 다시 꽃 필 수 있습니다.
나만이 내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좀 늦거나 이르거나, 보아주는 이가 있거나 없거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이유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 피고 지는 호야꽃으로 인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