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루틴, 운동화 끈 매기

by 우선열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땀이 날 때까지 걷는 것, 오랫동안 품어온 나의 저녁 루틴이다. 적당한 육체의 피로가 몰려오면 몸은 나른해지고 정신은 느긋해진다. 끓어오르거나 복잡했던 심기가 가라앉고 달콤한 휴식의 유혹이 손짓한다. 나는 그 경지를 좋아한다. 한때는 그 매력에 깊이 빠져든 적이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면 허둥지둥 일과를 마감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할까? 저녁 산책을 위해 하루를 보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나치면 모자란 것보다 못한 법. 저녁 시간을 위해 하루 일과가 대충 넘어가고 하루분의 에너지가 대부분 그 황홀경에 쏠렸다. '적당히'가 지켜지지 않았다. 균형이 깨지니 생활에 불편이 따랐지만 한 번 맛본 나른한 육체의 경지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마치 마약처럼 나를 끊임없이 끌어당겼다.결국 생활이 힘들어졌고 그 유혹을 떨쳐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조절이 아니라 포기를 해야 했다.
넉넉해진 저녁 시간은 또 그대로 위안이 되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기는 쉬운 일이다 . 한 번 맛본 게으름에 길들여지는 것은 운동화 끈을 묶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따스함에 서서히 익숙해져 물이 끓어오르는지도 모르는 '맹물 속의 개구리' 형국이었다.
저녁 시간은 다시 평범해졌다. 지나간 일로 노심초사하기도 하고 한순간에 끓어오르는 분노에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다. 길어진 이 저녁 시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저녁 산책의 시간이 그립지만 막상 용기가 나지는 않는다. 결코 편안한 길은 아니다.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육체의 피로를 견뎌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처음 시작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익숙해져 무념무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해본 경험이 있기에 시작은 더 어렵다.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르지만 세상 물정을 알아갈수록 두려움이 커지는 법이다.
운동화 끈 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저녁 시간에 가지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만 할 뿐이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극, 그걸 메꾸는 일이 내게 남았다. 고기도 먹어 본 자가 맛을 안다고 했던가. 한번 맛본 마약과 같은 경지를 쉽게 잊을 수 없고 다시 시작하려는 용기를 내기는 더 힘들다.
"언젠가는 하고야 말 거야." 저녁마다 되뇌는 말이다. 은퇴 후의 삶이니 퇴근이랄 것도, 정해진 일과도 없지만 땅거미가 내리면 공연히 싱숭생숭해진다. 운동화 끈을 맬 것이냐 말 것이냐,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 더 힘들다. 타인과의 약속은 잘 지키는데 나와의 약속에는 번번이 밀리는 생활습관 때문이리라.
누군가와 같이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지만 달리기는 모름지기 혼자 해야 한다. 자기 속도에 맞춰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들어야 제맛이다. 누군가 있다면 신경이 쓰여 제대로 몰입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경지다. "내일은 꼭 나가야지." 미뤄놓은 집안일을 하며 어젯밤에도 혼잣말을 했다. 저녁 운동을 나 자신에게 촉구하는 일 그게 요즘 나의 저녁 루틴이다. 빨리 이 '촉구하는 루틴'에서 벗어나 새 루틴. 달리기의 즐거움을 다시 맛보고 싶다.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는 날, 나는 다시 그 길 위에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