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목도리

by 우선열

'입동 추위에 애 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면 어디서나 난방을 하고 누구나 추위에 대비한 옷차림을 하게 되니 추운 날씨도 견딜 만해진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첫 추위가 문제다. 이때쯤은 아침저녁 일교차도 크니 옷차림이 허술해지기도 쉬워 추위에 속절없이 노출되고 만다. 이럴 때는 겉옷 하나쯤 챙겨야 하니 바바리코트가 제격이다. 코트 깃을 세우면 목덜미에 파고드는 바람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다. 멋과 실용을 겸한 옷의 매력이다. 조금 더 신경을 쓰려면 머플러가 제격이다. 코트와 어울리는 머플러를 매면 웬만한 자리에선 기죽지 않고 첫 추위가 심술을 부려도 그럭저럭 견딜 만해진다.

청춘 영화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도리를 매어 주는 장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는 이의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좀 더 애틋한 건 어쩔 수 없는 이별에서 어머니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자식에게 매어주는 장면일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콧날이 시큰해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엄마와 단둘이 외갓집에 가던 기억이 있다. 5남매 중 둘째 딸인

내 위치로 볼 때 그 당시 엄마와 둘이 하는 여행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첫 딸인 언니는 부모님들에게 태어나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경험하게 하였으니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남아 선호사상에도 불구하고 위상이 컸다. 바로 밑에는 남동생이다. 첫 아들은 대를 이어야 하는 사명감이 있어 부모 대신이라며 극진히 대접하던 시절이었다. 중간에 끼인 나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늘 언니와 동생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 무렵에는 둘째 동생도 태어났을 터이니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하기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을 듯한데도 그당시 흔하지 않은 두어 시간 이상 걸리는 기차여행을 했던 기억이다.

기적소리가 긴 여운으로 남아 있고 역에서 내려 철길을 따라 걷던 기억이 있다.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걸었건만 바람이 매서웠다. 어머니는 당신의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감아주셨다. 나도 단단히 긴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건만 어머니는 그 위에 덧씌워 주신 것이다. 칼바람이 불었고 목도리가 풀어져 날아가 버렸다. 어머니가 바람에 날아가는 목도리를 주우려 주춤주춤 뛰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7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은 좀체 잊히지 않는다. 어린 맘에도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그때 어머님은 왜 나만을 데리고 어렵게 외갓집에 갔을까? 동생들과 언니는 그날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궁금하지만 어쩐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 번도 어머니에게 그때 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고 어머니도 그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즈음에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육아를 도와주고 계셨다. 외할머니는 유독 남아 선호사상이 심한 편이었다. 첫 딸인 언니야 살림 밑천이라며 귀히 여기셨지만 둘째 딸인 나는 눈에 가시로 여기셨다고 한다. 언니에게는 참기름에 비빈 따스한 밥을 주고 내게는 물 말은 찬밥을 먹이더라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에 둘째 남동생이 태어나 일손이 더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마 나를 외갓집에 맡기려 한 것은 아닐까? 육아를 돕느라 힘든 외할머니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을 것도 같다. 어쨌든 지금은 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셨으니 확인이 불가능해졌다. 심증은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어졌다

. 양지 녁의 햇살과 칼바람, 바람에 흔들리며 날아가던 목도리, 그걸 주우려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몸짓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어쨌거나 어머님은 나를 외갓집에 맡기지 않고 나를 데리고 왔으며 나는 양보 잘하는 착한 둘째 딸이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난 건 나이 때문인가 보다. 나이 들면 누구나 추억이 소중해진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건 자기 보호 본능일 수도 있겠다. 어린 마음에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나 보다. 타고난 성정인지, 둘째 딸이라는 위치를 본능적으로 터득한 것인지 나는 유난히 착한 딸이었다고 한다. 투정 한번 제대로 부리지 않고 먹을 것만 주면 혼자 놀고 혼자 잠드는 순둥이였다는 것이다. 그런 나였기에 그날 자신의 목도리를 나에게 매어주던 어머니, 풀어진 목도리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던 어머님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나 보다. 철이 든 후 가끔 둘째 딸의 애환을 토로한 적이 있지만 그날 일만큼은 말할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그날 어머니가 매어 주던 목도리를 푸는 듯하다. 다섯 손가락 어느 하나도 다치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 마음, 그 마음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낸다. 지하에 계신 어머님도 이젠 편해지셨으면 한다. 둘째 딸이 더 이상 아픈 손가락이 아니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