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작은 히아신스 꽃피다

by 우선열


"아니 이게 뭐야?" 베란다 청소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구석에 처박아 놓은 화분에서 수상한 초록색 싹이 움트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작년 봄 히아신스 꽃이 지고 남은 구군이 안쓰러워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놓아둔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미 꽃 피고 진 자리에서 다시 싹이 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초록빛, 첫눈에도 잡초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 만큼 의연한 모습이었다

봄 새싹의 연약한 연둣빛이 아니라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한 듯 검푸른 초록빛이었다


'혹시 히아신스?' 생각이 미치자 "할렐루야" 한순간 머릿속에서 팡파르가 터지는 듯했다

"이건 기적이야, 12월에 새싹이 나다니, 그것도 내 베란다에서" 했지만 잠시였다.

죽은 나무에도 싹이 트는 4월이 아니고 한 겨울이다

지금부터 이 여린 싹이 감당해야 할 추위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걱정이 앞섰다.

나는 살아 있는 식물도 잘 키워내지 못하는 곰손 소유자인데 미련이 많다

꽃들이 지고 나면 진 자리가 늘 아쉬워 생명이 끝나버린 줄 알건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 놓고는 무심하게 잊고 마는 무심한 미련둥이이다.

제 딴엔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듯 단단해 보이지만 철 모르고 태어났으니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산 식물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내가 철 모르고 싹튼 어린것을 제대로 키워낼 수 있을까?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앞에 닥친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뒤졌지만 식물 청맹과니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얼지 않도록 온실처럼 따뜻하게 해주는 일뿐이었다

아침에 햇살 좋은 베란다에 내놓고 저녁이면 따뜻한 방으로 들여놓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무기력한 내 보살핌에도 히아신스 싹은 잘 자랐다

이대로 잘 크면 봄에는 꽃이 필 수도 있겠거니 나대로 부푼 꾼을 품었다

싹이 1.5 cm 정도로 컸을 때였다

싹의 꼭대기에 무언가 푸른빛이 점처럼 나타났다

작년에 피었던 히아신스 색이다

"설마?" 반신반의했는데 사실이었다

푸른빛은 조금씩 번져갔다


한 송이 한 송이 피어서 큰 한 송이를 만드는 히아신스 꽃이다

작은 이파리를 비집고 꽃들이 하나둘 피어나고 있었다

아침마다 들여다보는 꽃은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안쓰럽고 대견했다

하나씩 피어나는 모습에 환호하다가 이내 안타까워졌다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꽃을 피워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예쁘게 피어나는 꽃이 자랑스럽고 기특하다가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몸에서 꽃을 피워야 하는 고단함에 죄인이 된 듯 미안해진다


아직도 밑동에서는 꽃들이 피어나려 푸른색 꽃잎을 내밀고 있고 처음에 핀 꽃은 이제 시들어 간다

'2주쯤 지났으니 제 수명은 다한 것'이리라 미루어 짐작하지만 애처롭기는 마찬가지이다

피어나는 꽃을 보며 행복해야 할지 지는 꽃을 보며 슬퍼해야 할지 나는 아직 갈피를 못 잡겠다

다만 잘 자라지도 못한 몸에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워내고 있는 키 작은 히아신스가 기특하다

제때에 피어나지 못했지만 철을 이겨내면서 꽃을 피워내는 대견한 모습이다

대견하면서 슬프기도 하다

제대로 구근을 관리했더라면 남들과 같이 따뜻한 봄철에 싹트고 제대로 커서 탐스러운 꽃을 피워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철없는 주인을 만나 제철에 피지 못했다. 내가 죄인이다.


미안한 마음만큼 사랑하는 마음도 크다

눈 뜨자마자 히아신스를 보는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리 소중한 사람이 되어 보아야겠다'

키 작은 히아신스를 보며 아침마다 마음을 다잡아 본다

비록 잊힌 뿌리에서 싹이 났지만 겨울에 꽃 핀 히아신스는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