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은 겨울이 제격이다. 출발은 뺨이 얼얼하고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 운동화를 신고 발이 시려 두세 번 가볍게 빠른 스텝을 밟아야 할 수도 있지만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하던 성경 구절 같은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조금 불편한 듯 출발하는 겨울 러닝은 달릴수록 매력이 있다. 달리면서 조금씩 몸에 도는 훈기를 접하게 된다.
마침내 손끝까지 따스해지고 얼굴엔 출발할 때와 다른 따뜻한 홍조가 번지게 된다. 이때쯤이면 러닝 하이의 경지가 찾아온다.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 가득 충만한 기쁨이 차오른다. 마니아들이 오르가슴과 같다고 표현한 경지이다.
물론 다른 계절에도 달리는 즐거움이 덜하지는 않다. 달리다 보면 육체의 피로를 극복한 희열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달리기의 매력이지만 출발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가장 경쾌한 출발은 역시 봄가을이다. 운동화 끈만 매면 다른 저항 없이 가볍게 출발할 수 있다. 출발은 상쾌하지만 얼마 안 가 흐르는 땀을 씻어내야 한다. 달릴수록 주체할 수 없는 몸의 열기를 감당해야 한다
여름은 출발부터 땀과의 한판 승부이다. 끈적이는 기분이 출발을 망설이게 하니 일단 저질러야 한다.달리기가 시작되면 내가 바람을 만든다. 뜨거운 바람이다. 달릴수록 열기가 차오르지만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 더위를 잊게 하는 경지, 그것이 하이 러닝이다.
이 경지가 쉽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도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 서야 한다. 넘어지면서 한 발자국 떼고 다시 일어난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걸을 수 있다. 이 당연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처음이 힘들수록 달성의 기쁨이 커질 수도 있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딱 그 말씀같다. 다소 번거롭더라도 핑계 대지 말고 출발해야만 목적지에 닿을 수 있고 결과에 만족하는 법이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이 운동화 끈 매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1분도 채 안 걸리는 쉬운 동작이긴 하지만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이 마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날이 좋아서, 날이 안 좋아서, 날이 적당해서, 수만 가지 변명이 손을 묶어 운동화 끈매기가 쉽지 않다.
하필 그때가 겨울이었다. 여름생인 나는 겨울이 싫다. 겨울이 오면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처럼 몸이 둔해지는 것만 같다. 찬바람을 가르고 운동화를 신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날이 좋은 날이 더 힘들었다 '이 좋은 날 하필 달리기를?'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좋은 날 나는 하릴없이 겨울잠을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달리기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운동화 끈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던 날이었다.
어쨌거나 무사히 운동화 끈을 매고 거리로 나섰다. 코끝이 차가워지는 청량감이 싫지 않았다. '나서길 잘'했다 '스스로 칭찬할 수 있었다. 다소 고무된 내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달리기는 못하지만 걷기는 조금 빠른 편이기는 하다. 운동신경이 발달한 건 아니고 좀 급한 성격이라 느릿느릿 걷는 게 성에 차지 않는다.
산책길의 발걸음이 남보다 조금 빨랐나 보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을 하나 둘 앞지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신이 났다. 어느새 눈앞의 목표물을 정하고 있었고 어렵지 않게 앞지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은 지친 듯했건만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충족감이 차올랐다. 피로를 잊게 하는 카타르시스였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구나'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이 60이 넘은 후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젊은 시절과는 다르지만 나이 듦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깨달음이었다. 앞만 보고 내닫던 젊은 날과는 달리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와 경험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수 있었다. 목적이 없는 달리기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잘 쓰고 싶은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잘 쓰지 못해도 쓰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지만 글쓰기는 달리기와 조금 달랐다.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억지로 운동화 끈을 매어야 했고 그 순간이 지나고나서야 달리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글쓰기는 쓰는 즐거움이 먼저였다. 잘 쓰고 싶은 욕망만 잠재우면 되는 일이었다. 나이 듦이 해결해 준 것인지 달리기를 하며 배운 지혜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때부터 나는 잘 쓰려는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글쓰기 연습생이 되었다. 달리기의 즐거움을 처음 발견한 순간처럼 나는 잔뜩 고무되있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만 세상사 뜻 같지만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어도 한번 멈춘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처음 신발 끈을 매던 날처럼 나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달리기를 미루게 된다.
언젠가 글쓰기도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 그날이 겨울이었으면 한다. 출발이 조금 고통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편한 출발보다 조금은 고통스러워도 괜찮다. 겨울 달리기가 좋은 이유는 추위를 견뎌야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이다. 쾌적한 출발을 하는 봄 달리기 보다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겨울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아 버렸으니 글쓰기 슬럼프가 찾아와도 기꺼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렵게 출발할수록 즐거움이 클 수도 있다.
글쓰기가 고통스러운 날이 와도 출발선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주해야 하는 겨울 달리기의 묘미가 나를 일깨워 줄 것이다 .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이 말이 나를 불러 세우겠지만 글 쓰는 즐거움을 알아버린 지금이 좋다. 시작만 하면 된다